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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두얼굴

삼성을 생각하는 소비의 정치학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10. 4. 21.

나는 소비한다, 고로 투쟁한다

삼성을 생각하는 소비의 정치학
[19호] 2010년 04월 09일 (금) 17:47:06 홍성태/상지대 교수·사회학 info@ilemonde.com

소비자 주권은 보편적 인권의 첨예한 투쟁 영역
삼성 불매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맞선 개혁 운동

 

 소비자는 무엇인가? ‘왕’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많은 기업과 가게가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뒤에서는 손가락질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를 대한다.

‘소비자는 왕이다’는 말 자체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역설적 표현인 것 같다.

 

소비자는 이 말을 ‘제발 소비자를 왕처럼 모셔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지만, 기업과 가게는 이 말을

‘그저 소비자를 왕처럼 모시는 척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기업과 가게가 소비자를 ‘왕’으로 모신

다고 외친다 한들 정말 그렇게 받아들였다가는 아예 바보로 볼 수도 있다.


 소비자는 무엇인가? ‘봉’인가? 아마 이게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소비자는 ‘왕’이 되고 싶어하지만, 기업과 가게는 소비자를 ‘왕’으로 여기는 척하면서 ‘봉’으로 여기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요즘에는 소비자보호법이나 정보기술의 발달에 따라 소비자를 그저 ‘봉’으로 취급하는 기업과 가게는

‘대박’이 아니라 ‘쪽박’을 찰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자를 ‘봉’으로 여기는 기업과 가게의 태도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왕’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봉’에 불과한 소비자의 처지를 바꾸는 것은 사회 개혁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소비는 생산보다 무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직접 생산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만 직접 소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생명 유지라는 점에서 생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소비다.

내가 직접 쌀을 생산하지 않더라도 나는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생산자는 아니지만

소비자이기는 하다. 따라서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산 중심의 사회관을 소비 중심의 사회관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생산을 존중하고 소비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생산 없이는 소비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누구나

생산은 하지 않더라도 소비는 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소비를 생산에서 유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소비를 생산에 종속시키는 것도 잘못이다.

 

오히려 우리는 소비를 중심으로 인권을 재구성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존재하며, 따라서 소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면 소비자 주권에 대한 논의가 크게 재편돼야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소비자 주권은 단순히 생산된 제품을 이용해서 편익을 취하는 기생적 존재의 부차적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소비사회’라는 개념은 현대사회의 풍요와 불평등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지만, 이런 유의 비판이 소비의

근원성과 소비자의 보편성에 대한 무차별적 거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소비사회’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비판적 논의가 전면적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에 반대하는 국제 보이콧 운동 포스터

 

 소비자 주권의 개념은 단순히 소비의 편리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근원성과 소비자의 보편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따른 사회 개혁을 촉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소비자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올바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소비자 주권의 요청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올바로 누려야 할 권리이다. 이 권리가 올바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소유와

생산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차별·억압 등 온갖 문제가 전면적으로 투명하게 검토돼야 한다.


 소비자 주권의 주체는 소비자, 즉 모든 인간이다.

우리는 현대사회의 초석인 인권의 개념에 근거해서 소비자 주권을 보장하고 확대해야 한다. 소비자 주권의

보장과 확대는 그 자체로 인권의 강화로 귀결된다. 이 때문에 오늘날 소비자 주권은 첨예한 투쟁의 영역이

되었다.

 

오늘날 소비자 주권은 보편적 인권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핵심적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보편적 인권 관점에서 소비자 주권은 단순히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소비를 해야 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 해석돼야 한다. 우리 모두 불가피한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비자 주권의 보장과 확대는 인권 강화라는 점에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이중질서’의

문제를 약화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이중질서란 표면의 공식적 질서와 이면의 비공식적

질서가 함께 작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언명이 표면의 공식적 질서라면 다양한 형태의 차별은 이면의 비공식적

질서이다. 표면과 이면의 차이가 작을수록 신뢰의 기반이 강한 선진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표면의 ‘왕’과

이면의 ‘봉’ 사이에 처한 소비자의 처지도 이중질서 문제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이중질서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이른바 ‘위험사회’의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도

중요하다. 위험사회는 과학기술에서 비롯되는 온갖 물리적 위험뿐만 아니라 사회의 작동과 관련된 사회적

위험이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현대사회를 뜻한다.

 

이중질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편으로 사회의 작동을 더욱 투명하게 하고, 이로써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예컨대 소비자가 정말 ‘왕’과 같이 제품의 생산과 평가를 전반적으로

감시·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사회의 작동이 더욱 투명해져서 불량 제품을 우량 제품으로 유통시키는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오늘날 소비자는 위험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하는 사회의 개혁이다. 요컨대 소비자 주권이 올바로 보장되고

확대되기 위해서는 소비자 자신의 자각과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비자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기업이 제약하거나 학계와 언론이 나서서 소비자를 속이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소비자를 우롱하는 일도 흔하다. 심지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감독할

정당과 정부가 아예 대놓고 국민을 속이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조금만 주의해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소비자 주권을 잘 지키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기업은 물론이고 정당, 정부, 학계, 언론 등 첩첩산중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이런 점에서

소비자 주권을 지키는 일은 기존 통념을 넘어서 사회 발전을 위한 핵심적 과제로 이해돼야 한다.

 

따라서 소비자 주권을 지키기 위한 소비자 주권운동은 사회 발전을 위한 소비자 연대운동이어야 한다.

물론 그 기초에는 우리 모두가 소비자라는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모두가 소비자이므로 소비자

연대운동은 가장 폭넓은 사회운동이 될 수 있다.


 소비자 주권운동이 문제를 일으킨 특정 제품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 제품은 기업이 생산해서 정부의 승인을 받고 다양한 방식으로 선전된다. 따라서 소비자 주권운동은

이 모든 과정과 주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기업과 유착해서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는 학자, 언론 그리고

연예인은 당연히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른바 ‘불매운동’을 단순히 특정 제품에만 국한해서 인정하는 것은 소비자 주권운동을 강력히 제한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사회적 행위자는 사회적 주체로서 마땅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소비자 주권운동은 소비자인 우리 모두가 사회 전체에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 사회

발전을 이루려는 것이다.


 여기서 삼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삼성은 엄청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함께 참담한 문제의 주인공으로 비판받고 있다.

삼성은 최고 기업의 면모를 갖고 있지만, 이와 함께 정경유착과 부자세습의 대표라는 면모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삼성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기업으로서 반인권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경유착, 부자세습, 하청착취 등의 문제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삼성은 내부 감시가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를 삼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7년의 ‘삼성 ×파일’에서 잘 드러났듯이, 삼성은 외부의 감시를 무력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정말 ‘삼성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은 재벌이 정치·경제·문화에서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재벌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재벌은 모두 ‘토건재벌’이어서 한국은 ‘토건국가’라는

후진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재벌 중에서도 삼성은 내부와 외부의 감시를 모두 강력히 차단한 유일한 재벌이다. 이건희 회장의 복귀는

삼성의 문제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법원에서 어렵사리 인정된 ‘범죄’만도 막대한 이건희

회장이 곧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현역에 복귀한 것은 삼성의 막강한 힘을 여실히 입증했다.


 삼성의 문제를 폭로한 핵심적 내부자였던 김용철 변호사가 어렵게 출간한 <삼성을 생각한다>를 둘러싼

논란과 혼란도 삼성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다시 잘 보여주었다. 소비자 주권이라는 차원에서 삼성은

거대한 장벽이고, 그에 비판적인 주체들마저 그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삼성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삼성의 문제가 이대로 계속 악화된다면, 소비자로서 우리 각자는 정경유착과 부자세습에 따른 비용의 증대,

하청착취와 노동착취에 따른 불의의 증대, 신뢰 약화에 따른 불안의 증대 등 여러 문제에 시달릴 것이다.

그 총체적 귀결로서 ‘도요타의 실패’와 유사한 ‘삼성의 실패’가 빚어질 우려도 크다.


  기업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는 불매운동이 상당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소비자 주권운동 차원에서 펼쳐야 한다. 삼성 네트워크 전체가 문제이며, 그것을

개혁하는 것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다. 단순히 특정 제품의 불매를 넘어서 해당 기업과 그 네트워크의

문제를 널리 알리고 개혁해야 한다.

 

소비자로서 우리 각자의 복리는 구조적 문제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는 사회적 상상력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소비자의 힘으로 삼성을 개혁하자.

 

 

글•홍성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정책위원장,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4대강 저지 범대위 집행위원 등 이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실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의 강을 위하여> <민주화의 민주화>

<현실 정보사회와 정보사회운동> <대한민국 위험사회> <개발주의를 비판한다> 등이 있다.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