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 공유정옥씨를 처음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공유정옥씨는 올해 1월 삼성전자 LCD 천안 공장에서 투신 자살한 김주현씨의 장례식장에서 삼성측의 사과를 촉구하는 팻말을 묵묵히 만들고 있었다. 당시 1000여 명까지 수용 가능한 장례식장에는 유가족들과 공씨를 포함한 반올림 활동가들 10여 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연 이길 수 있는 싸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요 언론은 무관심했지만, 그는 사태 해결을 위해 밤낮 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고 산업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장)로서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사망 90여일 만에 지난 4월15일 삼성전자는 사장 명의로 ‘고인의 죽음에 대해 사과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해 노력한다’고 유가족과 합의했다. 포기하지 않은 유가족과 ‘반올림’ 투쟁의 성과였다.
지난 23일 유가족과 반올림은 수 년만에 또 다른 성과를 얻었다. 법원이 백혈병 발병과 반도체 공장 작업 환경 사이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판단해, 삼성전자 노동자(고 황유미, 이숙영씨)의 백혈병 발병을 산재로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판결이었다. 그동안 침묵했던 주요 언론들도 이날 적극적인 취재를 하고 보도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 언론의 플래시가 터지는 곳에선 공유정옥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8개월 간의 재판 과정에서 출석 예정된 증인들이 재판에 불참해 공판이 연기되기도 했고, 재판부가 변경되기도 했고, 산업 보건 전문가들의 증인 채택이 불발되기도 해 고민이 적지 않았을텐데 현장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었다.
공씨는 카메라 부근에서 한 발짝 물러나 묵묵히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자가 다가가 “고생 많으셨다”고 밝혔지만, 공씨는 이번 판결에서 불승인 당한 원고들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전했다. 주요 언론이 승소한 원고들에게 플래시를 집중할 때, 그는 패소한 원고들의 아픔부터 챙겼다.
공씨는 “삼성전자 같은 큰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에게도 충분한 산재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상황에서, 작은 사업장이나 현재 사라져 버린 사업장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노동자들은 더더욱 산재를 인정 받기 어렵게 될 수 있다”며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노동자에게 산재를 입증토록 하고 있는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씨는 “삼성은 본인들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 작업자들의 교육 훈련과 역량 강화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노조가 존재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씨는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꾸준하고 집요한 관심이 필요하다”며 “할 얘기는 많은데 입이 없는 우리들에게 입이 되어주는 역할을 언론이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황유미씨 죽음을 계기로 반올림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공유정씨. 지난 4년 간 묵묵히 끈질긴 싸움을 해온 공유정옥씨의 소회를 지난 24일 전화로 들어봤다.
- 이번 판결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보나? “이들이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4년 만에 너무도 힘들게 법적 타당성을 확인했다. 피해자가 산재를 입증하는 것, 삼성전자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뚫고 반도체 업종에서는 최초로 산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 이번 판결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판결이라고 한다. “미국의 IBM에서도 직업성 암,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당시 IBM은 노동자 수백 명에게 개인적으로 합의서를 써주고 보상을 했다. 다만, 합의 내용은 비밀로 했다. IBM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발생률이 높다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IBM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남지 못했다. 아시아에서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산재법이 제대로 갖춰진 곳이 많지 않은 실정이다. 법원을 통해서 직업병이 인정되기도 어렵다. 여기 저기 물어봤지만 이번 판결이 사실상 세계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 이번 판결에 대한 외국의 반응도 들어봤나? “그동안 외국의 여러 단체들에 국내 소식을 전해 왔었고, 이번 재판 결과도 전했다. 해외 여러 곳에서 축하 메시지가 왔다. 몇 개를 소개하면, 아시아 노동감시 센터인 AMRC(Asia Monitor Resource Centre)에서는 ‘축하한다’고, 전자 폐기물 관련 국제 환경 단체는 BAN(Basel Action Network)에서는 ‘자랑스럽고 중요한 성과’라고 회신이 왔다. 폭스콤 등 전자 산업 사업장의 화학물질과 노동자 자살 문제를 알려온 단체 SACOM은 삼성이 항소한다는 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나서 ‘부끄러운 삼성(Shame on samsung)’이라는 회신도 보내 왔다. RCA가 유해 물질을 남기고 간 대만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희망이 있는 것 같다’는 회신이 왔다. 이외에도 아시안 네트워크,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ICRT)에서도 축하 메시지가 왔다. 해외에서 지금도 계속 회신 메시지가 오고 있는데 추후 그쪽 반응을 정리해서 공개할 예정이다.”
- 하지만 법원은 정애정, 김은경, 송창호씨가 낸 소송에 대해선 "근무 공정의 특성상 발암 물질로 의심 받고 있는 각종 유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번에 법적으로 산재를 인정 받으신 분들은 가공 공장에서 오퍼레이터(operator)로 일했던 여성들이다. 오퍼레이터들은 일하는 패턴이 어떨지 추정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이번에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엔지니어들(주로 남자)은 굉장히 다양한 상황에서 패턴을 정형화 하거나 추정하기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한다. 이처럼 일의 패턴을 추정하기 어렵고 사업장에서 오래 전에 일한 전직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산재 근거를 대지 못했다고 법원이 판단한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결정이다. 삼성전자 같은 큰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에게도 충분한 산재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상황에서, 작은 사업장이나 현재 사라져 버린 사업장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노동자들은 더더욱 산재를 인정 받기 어렵게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노동자에게 산재 입증을 하라는 것 제도가 없어져야 한다. 거꾸로 사측이나 정부에게 ‘유해 물질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산재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정말로 삼성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이 소송은 삼성을 비난하거나 해를 주는 판결이 전혀 아니다. 일례로 교통 신호를 잘 지켜도 사고가 나듯, 반도체 공장의 안전 장치가 있더라도 사람들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삼성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이런 일이 있어날 수 있다. 또 오히려 이번 소송의 당사자는 근로복지공단인데 삼성이 항소한다고 밝히는 것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삼성이 뒤에서 이번 재판에 관여해 왔다는 것이 들켜 버린 게 아닌가.”
- 18개월의 지난 재판 과정을 돌아보면 아쉬움과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공판 방청을 한 번 빼고는 다 지켜봤다. 재판 첫 날을 잊을 수 없다. 우리쪽은 정말 어렵게 두 분의 변호사가 왔는데 피고측 보조참가인의 소송 대리인으로 국내 메이저 로펌 율촌에서 네다섯 분쯤 왔다. 우리는 행정소송 다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저 큰 회사인 삼성전자가 고용한 거대 변호사들과 맞서고 있고, 이들이 최선을 다해 노동자들이 산재 보상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담하고 착잡했다.”
-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암담한 심정이었나? “‘계란으로 바위치기’ 심정이었다기 보다는 ‘참 삼성이 못됐다’는 기분이었다. ‘삼성이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못 되게 안 해도 되는데’라는 심정이었다. 원고 분들이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뺏어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충분한 산재 근거가 있어 법에 따라 정부측에 소송을 하는 것인데, 이걸 왜 이렇게 과도하게 막으려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삼성측에서 이렇게 과도하게 대응을 안 해도 승소하기 어려운 재판인데, 왜 이렇게 대응하는지 궁금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 숨기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 황상기씨가 지난 2007년 ‘삼성 백혈병’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 한 뒤 사실상 삼성을 상대로 수년 간 싸움을 해왔다. 삼성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것 같다. “삼성은 이번 재판의 소송 당사자가 아닌데도 항소한다고 밝힌 것처럼, 그동안 삼성은 너무 오만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 막강한 사람들에게 맞서서 여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온 것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 또 삼성이 너무 못 되게 행동을 해서 속상했다. 그동안 반올림이 제기한 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사실 삼성에게 기본을 지키라고 싸움을 한 것이다. 지난 수년 간 삼성과 싸우면서 우리가 했던 얘기는 ‘투명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매번 유해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환경이었다고 말만 하지 말고, 사업장에서 무슨 화학 물질을 사용했는지, 반도체 공정에서 근무하는 생산직이 몇 명인지, 이중 노동자 몇 분이 병들었는지 공개하라는 기본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삼성이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니까 우리도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삼성이 조금 더 민주적이고 좀 더 상식이 통하는 회사였길 바랐다. 노동자들에 대한 건강보호를 위해 발 빠르게 반응해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지 않나.”
“개인적으로 크게 원망스럽지 않았다. 메이저 언론의 외면은 힘들었다기 보다는 기대도 안 했다. 오히려 굉장히 많은 시민 분들이 힘을 많이 모아줬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100원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100원이라도 기여해 주겠다는 분들이 많아서 고마웠다. 다만 언론에 조금 아쉬웠던 것은 있다. 다른 회사에도 고통 받고 계신 많은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 얘기를 열심히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삼성 이외의 다른 회사 분들 얘기도 앞으로 많이 해주길 기대한다.”
- 언론에게 바라는 점이 더 있다면? “반도체 공장의 문제에 대해서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방송이 영상을 통해 훨씬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정보 전달 면에서 힘이 있는 방송이 제대로 잘 보도했으면 좋겠다. KBS <추적60분>에서 보도한 적도 있지만, 방송이 좀 더 다양한 내용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진실을 알렸으면 한다. 할 얘기는 많은데 입이 없는 우리들에게 입이 되어주는 역할을 언론이 했으면 한다. 이것은 모든 힘 없는 사람들이 언론에 바라는 바다. 또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꾸준하고 집요한 관심이 필요하다. 같이 진실을 탐색해 갔으면 한다.”
- 앞으로 '삼성 백혈병' 문제가 근본적으로 개선되려면 삼성에 노조가 설립돼 내부 견제도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당연한 지적이다. 산업안전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 결점이 있는지 의심하는 것인데, 삼성은 본인들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 작업자들의 교육 훈련과 역량 강화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노조가 존재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업장에 노조가 있느냐 없느냐, 노조 활동이 얼마나 보장돼 있느냐는 산업 안전 보건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장 문제를 제일 잘 알고 있고, 그걸 찾아 개선할 수 있는 것도 그분들의 몫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자주적 조직을 갖추고 역량을 갖는 만큼 작업장이 개선되는 것은 명백하다. 회사가 최고의 설비를 갖추고 최고의 전문가를 고용한다고 해도 현장 노동자들이 느끼는 실질적인 환경 개선을 이룰 수가 없다.”
- 앞으로 이 같은 행정소송이 늘 것 같은데, 향후 활동 계획은? “지난 3월, 120명의 제보자를 발표한 이후 계속 제보자가 늘고 있다. 이번 판결이 보도된 뒤 제보자가 늘 것 같고, 비슷한 사안에 대한 소송도 늘 것이라고 본다. 삼성전자 전직 노동자들의 2차 행정소송 공판도 다음 달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해 왔던 일을 계속 잘 해나가야 한다. 또 그동안 우리의 활동이 ‘삼성 백혈병’에 국한돼 주로 알려졌는데 다른 회사의 피해자들도 지키는 폭넓은 활동도 하려고 한다.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의 투병-복지 등 생활적인 고민에 대해서도 어떻게 대처할지 구상 중이다. 외국의 사례를 검토하며 정보를 얻으면서 국제 연대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 ‘반올림’이라는 이름처럼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방향으로 운동을 해 나가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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