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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두얼굴

모든 언론 앞의 절대자, 삼성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11. 9. 3.

 

 

든 언론 앞의 절대자, 삼성

 

 

[Corée 특집] 민주주의의 스토커, 언론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일하는 사람이 레임덕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관측을 교묘히 부인했다. 하지만 징후까지는 어찌하지 못한다. 적어도 언론에서는 이미 오리가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정부의 잘못과 관련해 비판적 의견은커녕 ‘팩트’조차 무시하기 일쑤이던 대다수 기성 언론이 슬슬 몸을 푸는 모양새다.

 

권력을 요리하는 데 대가로 꼽혀온 ‘밤의 대통령’ 조·중·동의 태도야 그렇다 쳐도 최근 괄목할 만한 곳은 단연 <한국경제>다. ‘MB 4년차 증후군에 발목 잡히나’, ‘노무현 닮아가는 MB 정부’ 등의 기사와 칼럼이 여느 때와 달리 <한국경제>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을 필두로 삼성·LG·SK 등 내로라하는 재벌 대기업을 대주주로 둔 든든한 <한국경제>는 재벌의 이익에는 민감했을지언정 특정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찬반은 굳이 표명하지 않던 곳이다.

 

물론 최근 조·중·동을 비롯해 매일경제신문에 종합편성채널을 내주면서 한국경제신문만 물을 먹인 탓에 정부가 공격받고 있다는 설명이 힘을 얻고는 있다.

 

자본권력에 레임덕은 없다

 

<한국경제>의 이명박 정부 공격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위상을 보여주는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제 정치권력을 비판하지 못할 언론은 없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신문은 신문사와 신문사주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때로 아부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적절히 활용한다. 언론에 정치 민주화는 자유이든 방종이든 표현의 권리를 대폭 넓혀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뿐 아니라 모든 정치권력의 레임덕은 이미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레임덕을 겪지 않는 권력이 있으니 바로 자본권력이다. 돈은 돈이 사라짐으로써 힘을 잃을 뿐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해내는 자본에 레임덕은 형용모순일 터다. <한국경제>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판에,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과 삼성의 제품을 비판하는 보도를 우리나라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다.

 

언론이 함부로 언급하지 못하는 삼성의 이면에 자본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과 절대권력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에 대한 언론의 굴종은 결코 강요된 것이 아니다. 삼성그룹과 관련한 각종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삼성의 홍보팀이 뛰는 일은 이제 더는 없다. 언론은 삼성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긴다. 삼성그룹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경우를 보면 명확해진다.2007년 가을이었다. 검사 출신으로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 변호사가 작심하고 핵폭탄급 양심선언을 했다.

 

<한겨레>가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내용은 구체적이었고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이토록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사실을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감추는 것만큼 큰 왜곡은 없다. 일부 신문의 보도도 핵심적인 사실관계 일부만 짧게 간추려 건조하게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의무방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삼성의 무시, 언론의 자발적 복종

 

그런데 며칠 뒤 대한민국 1등임을 내세우는 <매일경제>에 한 칼럼이 실렸다. 제목은 ‘불편한 진실, 불량한 폭로’였다. 진실은 불편한데 폭로는 불량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칼럼은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등록 회피와 부자들이 가진 걸 감추려는 걸 나무랄 일이 아니라고 못박았고, 심지어 ‘빈자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라도 지갑을 보여달라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늘어놨다. 진실 규명을 게임 수준으로 평가절하하고, 진실의 내용을 따져볼 생각은 없이 진실 논란이 빚어지는 현상만을 탓했다.

 

이 경제신문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신문 보도가 그랬다. 당시 도리어 여러 신문들이 삼성전자를 칭송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삼성전자 부사장과 주요 언론사 경제·증권부장 간담회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삼성 비자금 사태가 터진 판에 삼성전자가 언론사 간담회를 열고 비자금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명도 없이 자사의 장밋빛 전망만을 소개한 것도 비판받을 일인데,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한겨레>만이 여러 날에 걸쳐 삼성 비자금 의혹을 비중 있게 보도했을 뿐이다. 여기에 동참한 언론은 <경향신문>이 거의 유일했다.삼성그룹이 신문사들에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을까? 차라리 그랬다면 상황이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삼성은 그냥 무시했다. 그리고 언론은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삼성 비판 기사와 관련해 압력이나 부탁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언론 스스로 쓰지 않고 축소하고 더 나아가 비위를 맞췄고, 누가누가 더 잘 비위를 맞추는지 경쟁했을 정도였다.

 

광고 끊어 독립언론 목줄 죄기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두고 경제신문 광고 매출의 3분의 1을 삼성그룹이 채워주고 있음을 떠올리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삼성이 지금까지 언론에 퍼부은 막대한 광고비가 이런 결실을 만든 주역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만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동원한 재벌과 언론의 부적절한 만남은 언론의 자발적 복종이라는 훨씬 더 무시무시한 결과로 나타났다.

 

뻔히 눈앞에 도둑질이 벌어지는데 경찰관이 도둑에게 의로운 시민상을 주는 형국이다. 경찰관은 도둑과 오랜 기간 교분을 나눠왔다. 돈이 오갔겠지만 돈은 상징일 뿐, 그 안에는 가치 공유가 있었던 것이다. 도둑질이 도둑질로 보이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얘기다.언론의 자발적 복종 뒤에는 두려움도 있다. 삼성그룹 비자금 폭로를 외롭게 묵묵히 보도해온 <한겨레>는 이들의 복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왜 기업과 언론이 밀월에 나서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한겨레> 역시 판매 매출보다 광고 매출에 더 많이 기대는 대한민국 미디어기업 중 한 곳이다.

 

제아무리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국민 주주가 창간한 신문이라 해도, 시민단체가 아닌 엄연한 주식회사고 언론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 독야청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겨레> 역시 삼성그룹의 광고 지출에 상당히 의존해왔다. 그리고 외롭게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비자금 의혹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삼성의 광고를 이용한 언론 탄압 규탄>, 2008-박승화

 

그 결과는 삼성그룹의 광고 중단이었다. 무려 2년간 <한겨레>는 삼성그룹의 광고를 받지 못하면서 경영난을 겪게 된다. 기자를 포함한 임직원의 임금이 삭감되고 각종 비용 지출을 줄이며 허리띠를 졸랐다. 내핍 경영에 익숙한 <한겨레>는 큰 동요를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알게 모르게 월급이 나오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몇몇 기자는 신문사를 떠났다. 어느 매체에 광고를 실을 것인가는 사기업의 자유겠지만, 이런 자유가 하필 자사 비판 보도를 실은 신문사들에만 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신문사의 존폐 위기를 낳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삼성그룹의 실질적 최고 책임자는 형식적 처벌을 받고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상 유례없는 단독 사면의 성은을 입게 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며, 도리어 차명계좌 등 불법적 방식으로 보유하고 있던 재산은 합법화된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의 사주를 받았던 게 아니냐는 웃지도 못할 우스개가 언론계에 오갔다.조·중·동과 경제신문 등은 그렇다 해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독립언론 역시 삼성이 대표하고 상징하는 자본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한겨레>는 삼성이 광고를 중단한 2년 동안, 삼성 광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겨레>가 삼성 광고 없이 경영을 한다는 것은 매출 유지와 안정적 경영을 위해 매우 부담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보도와 광고 사이에 확실한 방화벽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삼성이든 어디든 광고를 최대한 많이 따내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겨레>와 삼성 사이에는 광고가 중단된 동안 물밑에서 광고 재개를 위한 협상과 투쟁이 있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광고 대신 협찬 주고 길들이기

 

기존 보수 언론을 거의 완전무결하게 장악한 삼성으로선 눈엣가시 같은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독립언론을 길들이는 게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일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이후 삼성이 두 신문에 광고를 중단한 것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광고전략으로 볼 수 있다. 뼈대는 더욱 교묘해지면서 동시에 노골화한 ‘언론 길들이기’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대한 광고 중단의 반대편에선 이건희 회장의 행보와 관련한 특정 시기에 조·중·동 3사에 광고 물량 공세를 펼쳤다.

 

경제개혁연구소(ERRI)는 이런 방식을 ‘선택과 집중·배제’의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 연구소가 지난해에 낸 ‘재벌의 언론 지배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삼성그룹의 신문광고비 총액에서 각 신문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가 모두 5%대였지만, 2009년에는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각각 0.03%와 0.02%로 급락한 반면 조·중·동 3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26.04%에서 2009년 33.85%로 급증했다.

 

독립언론은 제구실 다했나?

 

지난해 삼성은 사실상 광고 중단을 풀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다시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삼성이 순조롭게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지면에 광고를 싣고 광고비를 주는 방식보다는 지면 광고 노출 없이 드러나지 않게 협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하면 협찬받는 언론사를 뜻대로 휘두르기가 더 쉬워진다. 광고는 명확히 돈을 줘야 할 근거가 남지만, 협찬은 주면 고맙고 안 주면 그만인 것이다.

 

삼성은 광고 중단, 광고 대신 협찬 등 치밀하게 짜낸 전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독립언론까지 자본권력에의 굴종을 내면화하도록 강압하고, 또는 유도하고 있다. 뉴미디어의 도약으로 신문광고시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상황에서 가뜩이나 자본력이 부족한 독립언론은 선택지가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주와 신문이 광고를 매개로 유착하지 말고 광고효과를 근거로 건전한 상생관계를 이뤄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울림 없는 메아리 같다.결국 독립언론이 제구실을 다하는 ‘언론’으로 남으려면 물적 토대를 다지는 길밖에 없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독자들의 각성을 요구하고 싶다.

제구실을 하는 언론을 선택하라는 요청이다. 제 이익을 위해 공익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유사 언론’의 폐해가 독자에게 얼마나 엄청난 피해와 손실로 돌아가는지를 각성했으면 한다. 물론 이에 앞서 독립언론이 거듭나야 한다. 더욱 정확하고 바른 보도를 하기 위해 애써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늘 고민을 거듭해야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기업들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경영상의 노력 역시 필요하다. 과거의 관행적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독립언론조차 광고에 목매고 있는 것이다. 후진적 경영을 답습해온 행태에 대한 반성은 곧 조·중·동이 못하는 언론의 제구실을 하겠다면서도 경영 방식은 조·중·동을 그대로 따라가는 현실에 대한 깊은 반성이어야 한다. 언론 자유 앞의 절대자, 삼성을 넘어서려면 삼성을 능가하는 경영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글•김진철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 당신이 절대 모르는 경제기사의 비밀>(2010)을 썼다.

 

(폄)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