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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는 언어다

“청각장애인 환자들을 위한 수화 통역, 작은 관심에서 시작했죠”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11. 10. 30.

“청각장애인 환자들을 위한 수화 통역, 작은 관심에서 시작했죠”

 

[노컷헬스 김가희 기자]

지난 17일 낮 12시 30분 세브란스 병원 강의실. 하얀색, 분홍색, 하늘색 등 특유의 파스텔 톤 병원복을 입은 회원들이 한 명 두 명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윤수호 간호사가 시술이 있어 15분 늦었다. 그녀는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 대신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수화로 인사를 건넨다.

 

 

세브란스 병원 직원들로 구성된 수화 동아리 '빛소리회'는 매주 월요일 청각장애인 선생님을 모시고 수화 수업을 받는다. 30분 수업 받고 30분 동안 점심 식사를 같이 하는데 그 마저도 바쁜 직원들은 점심을 포기하고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종합병원의 수화교실은 벌써 10년째 열리고 있다.

◈ 2000년 병원 직원들 주축으로 수화교실 1기 개설, 올해로 10년

수업이 시작되자 김준호(37, 의과대학 해부학실 기수) 빛소리회 회장이 유인물을 회원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수업을 들으며 중간중간 네이버 카페에 올릴 동영상을 촬영했다.

그는 "외국어처럼 수화도 하나의 언어"라며 "수화는 손이 동작을 기억해야 되기 때문에 회원들이 잊지 않고 연습할 수 있도록 동영상을 촬영해서 카페에 올린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오늘 어깨 동작을 활용한 단어 13개, 가슴을 사용한 단어 18개를 배웠다. 30분치고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선생님은 말 대신 동작과 표정, 입모양으로 가르치고 회원들은 따라한다. 교실 안에서는 '어렵다' '이건 쉽네'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화교실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시작된 건 수화통역사 없이 병원을 찾는 청각장애인 환자들을 위해서였다. 전문 수화통역사가 상주하지 않는 병원에서 청각장애인이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필담을 나누거나 개인적으로 수화통역사를 고용해야 한다. 병원 수속부터 진료, 입원, 퇴원 등 모든 과정에서 필담을 주고 받는 것은 아픈 환자에게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청각장애인들이 다급한 순간에 수화통역사를 고용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빛소리회 1기 회원인 윤수호 간호사(40, 영상의학과 간호사)는 "빛소리회가 만들어진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세브란스 병원에 수화를 할 수 있는 직원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청각장애인들이 많다"면서 "수화통역사는 전문적인 의료 지식을 통역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병원 직원들이 수화를 배우면 이 같은 점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정인 간호사(31, 감염내과)는 "환자들과 마주하는 부서에 일하기 때문에 실제로 청각장애인 환자들이 오면 수화로 인사를 하고 짧은 대화도 수화로 나눌 수 있어 좋다. 청각장애인들 입장에서는 수화를 하는 간호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더 편안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300여명의 직원들이 수화교실을 수료했고 현재는 5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빛소리회는 수화교실 외에도 계산 농아인교회에서 건강 정보를 수화로 알려주는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 암센터와 어린이 병동에서 찬조공연을 정기적으로 선보이며 병원 내에 수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4월 20일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에서 가수 아이유와 함께 수화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병원 안팎에서 수화 공연을 해 모은 기부금으로 청각장애인 수술비를 마련하고 청각장애인 청소년 공부방을 지원하는 등 빛소리회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 영역을 넓히고 있다.

2년여 간 빛소리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준호 씨는 "실제로 수화를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도 많다. 청각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수화를 배우지 못했다면 수화를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수화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이다. 예전에는 대학 내 수화 동아리가 활성화 되었으나 요즘에는 대학생들의 지원이 줄면서 수화 동아리가 없어지고 있는 학교가 많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는데 참 아쉽다"고 말했다.

이기주 씨(43, 사회사업팀 사회사업사)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면서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수화 강좌를 들은 경험이 있어 빛소리회에 가입하게 됐다. 그는 "대학 이후에는 수화를 활용할 기회가 없었는데 세브란스 병원에 입사해 빛소리회에서 다시 수화를 배우며 봉사를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 '직장 내에 수화교실, 동아리 더 많이 생겨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 바꼈으면'

빛소리회 회원들은 세브란스 병원뿐 아니라 다른 기업에도 직장인들이 수화를 배울 수 있는 수화 교실이나 봉사활동을 하는 수화 동아리가 직장 내에 생겼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윤수호 간호사는 "영화 '도가니'에서 2급 청각장애인 소년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청각장애인이라도 급수에 따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알 수 있다. 영화로 인한 관심이 얼마동안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직장 내 수화 교실이나 봉사 동아리가 더 많이 생긴다면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빛은 들리지는 않아도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온도를 느낄 수 있다.

병원을 찾는 청각장애인 환자들에게 빛과 같이 따뜻한 소리를 전하고 싶다는 것이 빛소리회의 창립 취지다. 이들에게 3년간 수화를 가르치고 있는 전문 수화 강사 김명숙 씨(41, 청각장애인)에게 빛소리회와 함께 해 온 소감을 묻자 수화로 "감동"이라고 했다.

그는 1년 전 진료를 받았을 때 의사로부터 수술을 받으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수술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김명숙 씨는 수화를 배우는 노하우도 귀뜸했다.

"얼굴 표정도 수화의 일부다. 따라서 표정도 함께 연습하는 것이 좋다. 청각장애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하는 마음 또한 중요하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면 좋을 것 같다 (윤수호 간호사의 수화 통역)"

* 일반인이 빛소리회에 참여하려면? 네이버 카페에 가입, 신청하면 된다. (http://cafe.naver.com/bitsori)

(폄) http://med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