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어는 언어다

'수화이름'은 "농사회의 출입증"이다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6. 10. 20.

이 글은 "청림회"(http://www.clsign.pe.kr)에 개재된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농아인들에게만 부여되는 수화이름****


인간들은 저마다 태어날 때부터 본인의 의지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철저히 타인의 선택과 결정으로 모든 걸 척척 진행하게 된다.

시부모님이 작성해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돈을 내서라도 좀 더 좋은 이름을 얻기 위해 작명소를 기웃거리는 자기부모가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게 된다"는 오래된 속담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인생과 이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의 가치가 더더욱 드높을 수밖에 없다.

건청인들에게 자기이름 하나만 갖고 살아가도 불편은 없지만, 농아인들에게 자기이름과 수화이름 두 개를 갖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수화이름이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농아사회에서의 삶을 영위할 때 이만저만 불편이 아니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수화이름이 없으면 농아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수화이름의 위력이 아주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하고 처음 만날 때 으레 통성명을 하거나 명함을 교환하지만, 농아인들은 수화이름 하나만 교환한다.

 

얼마나 편리한가. 농아사회에 명함보다 수화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크다.

수화이름을 소유하고 있는 청각장애인과 수화이름을 소유하지 못한 청각장애인의 차이가 농아사회로부터 얼마만큼 소외감을 느끼고 있느냐에 따라 쉽게 판별이 가능하다. 전자는 우리가 농아인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우리가 구화인 혹은 난청인이라고 부른다.

수화이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한 구화인, 난청인들이 다수의 농아인들하고 어울리면서 '수화이름이 없다는 게 얼마나 큰 불편을 초래하게 하는가'를 깊이 절감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뒤늦게 막무가내로 주위사람들에게 수화이름을 지어달라고 조르는 등 안쓰러운 풍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수화이름은 농아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일종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출입증이며, 농아사회에서 식별기호로서 아직도 수화이름이 유용하게 널리 쓰이고 있다. 농아인들과의 사교나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수화이름이 필요하다.

농아인들이 농아학교에 들어갈 때 또래아이들이나 선배들로부터 수화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그러한 고전적인 방법이 놀랍게도 지금까지 계승되어 있으며 농아사회의 문화양식으로 굳게 자리를 잡고 있다.

대체적으로 얼굴의 흉터나 눈에 띄는 곳을 가리켜 형상화시키는 데 그것이 수화이름의 특징이다. 얼굴의 흉터나 눈에 띄는 곳을 가리켜 형상화시키지 않고, 독창적으로 수화이름을 만든 사례가 종종 일어나는데, 그건 35만여명의 농아인들중에 비슷비슷한 수화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앞으로 농아인들이 점점 많아지거나 수화이름이 똑같은 등 혼선을 빚어지는 사례가 빈번해지면 얼굴의 흉터나 눈에 띄는 곳을 가리켜 형상화시키는 고전적인 수화이름이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물러나게 될 것이며, 비주류에 머물고 있는 독창적인 수화이름이 기지개를 켜고 주류에 진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수화이름은 한번 부여받으면 제마음대로 바뀔 수가 없고,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게 된다. 수화이름을 바꾸고 싶은 필자가 몇 번이나 그러한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유인즉슨, 수화이름을 바꾸려면 자기수화이름을 인식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합의가 있어야 하고 일일이 찾아가서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러한 불편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초등생때 부여받았던 수화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수십여년간 수화이름이 아직도 그대로인 경우가 많은 농아사회를 바라보면서 새삼스럽게 수화이름의 생명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서 서술했듯이 수화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농아인들이 자기이름과 수화이름을 병행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자기이름은 외부세계 즉 이 사회에 나아갈 때만 쓰고, 수화이름은 내부세계 즉 농아사회에 나아갈 때만 쓰게 된다.

자기이름과 수화이름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모순 또한 일으키지 않는다. 자기이름과 수화이름이 조화롭게 평화공존을 이루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가 목도하게 된다. 농아사회에서 자기이름보다 수화이름이 더 중요하다. 그만큼 쓰임새가 많기 때문이다.

수화이름이 그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한번 부여받으면 쉽게 바꾸기가 힘들다는 수화이름이 여러 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이름과 수화이름을 둘 다 갖고 있는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농아인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화이름이 농아사회의 자랑스런 독창적인 문화라고 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을 것이며 후대의 농아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을 물려줘서 그들로 하여금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수화이름을 소중히 다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