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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는 언어다

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강의를 '들어?'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7. 3. 21.

들리지 않는 사람이 강의를 어떻게 ‘들어?’

 

청각장애학생에게 수화·문자 통역 지원하지 않는 것은 “차별”
김유미 기자 메일보내기

상상해보자. 나는 대학생이고,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에 와 있다. 수업 시작. 강단에 선 교수가 말로 설명을 하고, 가끔 한두 단어를 칠판에 적는다. 옆에 앉은 학생들은 교수의 말 중 중요한 대목을 공책에 받아 적는다.

 

하지만 나는 수업 내용이 뭔지 알아들을 수 없다. 나는 어릴 때 사고로 청력을 잃은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수업이 계속되는데. 자, 이때 ‘나’의 기분은 어떨까?

 

국가인권위원회가 18일 “청각장애학생들의 출석 수업 시 수화통역이나 문자통역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학습권 차별”이라고 밝혔다.

 

이는 2006년 3월 장애인교육권연대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청각장애학생들의 출석 수업 시 수화통역이나 문자통역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며 낸 진정에 대한 조치로, 인권위는 방통대 총장에게 청각장애학생들의 학습권이 보장되도록 수화통역이나 문자통역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1972년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격대학으로 대부분의 강의가 TV, 라디오, 테이프 등을 통해 이뤄진다. 출석수업은 매 학기 2~3일 정도로, 수업은 전국 14곳에 설치된 지역대학이나 시·군학습관에서 이뤄지고 있다.

 

인권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2006년 1학기 기준 방통대 재학생은 18만6599명. 이 중 장애인은 936명, 청각장애인은 38명으로 청각장애 학생들은 14개 과에 분포돼 재학 중이다.

 

방통대 측은 그동안 청각장애학생들의 출석수업시 수화·문자통역을 지원하지 않은 것은 출석 수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어 각 지역대학별로 수화통역사나 속기사 등을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이를 ‘차별’로 판단했다.

△ 청각장애인으로 UCLA를 다닌 박민정씨가 보낸 사진. 앞에서 교수님이 말하면, 속기사가 속기하고 박민정씨는 속기록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읽으면서 필기를 한다. ⓒ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현행 특수교육진흥법, 장애인복지법 등은 교육기관이 장애인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적합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청각장애학생의 교육권 문제는 방통대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과 장애인교육권연대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장애인특별전형을 실시하고 있는 전국 51개 대학 중 청각장애학생에게 문자통역을 지원하는 대학은 국립대 2곳, 사립대 7곳으로 9곳. 수화통역을 지원하는 국립대는 한 곳도 없었고, 사립대는 6곳이 있었다.

 

하지만 수화·문자 통역을 지원하는 학교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일반학생들의 봉사나 근로에 의존하고 있어 서비스의 ‘질’을 담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문자통역을 지원하고 있는 9개 대학 중 속기사 자격증을 소지한 인력을 배치한 대학은 1곳, 수화통역을 지원하는 6개 대학 중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가진 인력을 배치한 대학은 4곳에 불과했다.

 

장애인교육권연대 관계자는 “전문 수화통역사나 속기사가 아니면 전문적인 수업 내용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고, 더욱이 장애학생을 보조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장애학생들의 교육권이 보장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 국감자료에 따르면 장애인특별전형을 실시하는 대학 51곳 중 장애학생의 교육지원을 담당하는 인력이 배치된 학교는 18곳에 불과하다. 장애인특별전형을 실시하면서 장애학생에 대한 교육 지원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대학도 10곳으로 나타났다.

 

장애인교육권연대 관계자는 “대학에 ‘장애학생지원센터’ 같은 전담기구 설치를 강제해 장애학생 보조 인력이나 학습기자재를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교육권연대가 장애인특별전형을 실시하는 대학의 도움을 받아 최근 몇 년 간 입학한 청각장애인 수를 집계한 결과, 매년 7~80명 정도의 청각장애인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에 52개 대학에 76명, 2006년에 43개 대학에 75명이 입학했다.

 

한편 교육권연대가 집계한 장애인특별전형을 실시하지 않는 4년제 일반대학에 입학한 청각장애인 수는 지난해만 43명. 교육권연대 관계자는 “장애에 따른 적절한 교육지원을 거의 못 받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