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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위원의 역할과 자세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7. 11. 28.

 

 

교섭위원의 역할과 자세




하 종 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www.hadre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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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바른 관점으로부터 시작하자


2. 단체교섭 투쟁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3. 노동조합 활동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4. 노동자 임금을 바르게 이해하자


5. 단체교섭 투쟁의 원칙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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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바른 관점으로부터 시작하자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자유경쟁사상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으로 체계화한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회에 가장 바람직하게 기여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같은 사실을 각각 다른 위치에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어렵다.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올바른 전망을 세울 수 있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도 달리 보게 마련이다.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경영자는 자본의 관점으로, 정치인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세 가지가 모두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관점이 옳은 것일까?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최소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상하게도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도 몇 년의 세월이 지나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가 많았다. '전교조' 의 합법화나 공무원의 단결권 인정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놀라운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고 자랑했던 박정희 정부의 '한강의 기적'에 대해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저임금을 경쟁력의 기반으로 하는 잘못된 경제 정책이 언젠가는 우리 경제를 빈 깡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말은 20여년 뒤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예언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하, 이래서 사회적 약자, 노동자가 진보세력이로구나' -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현실이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구조적 관점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은 반드시 지식과 교양과 인격의 수준과 비례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 것도 그 예 중의 하나다.


어느 청각장애인이 20년 동안의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가 되었다는 감동적인 내용의 성공담들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역시 뭔가 석연치 않다.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구조를 개인의 불성실로 은폐하는 불순한 시도가 그 글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장애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담을 읽으면서 인생의 실패자들은 “당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의 게으름과 무능과 불성실 때문”이라는 질타를 듣는다. 그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을 숨어서 챙긴 더러운 세력 때문에 자신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원인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몇 년 전, 프로야구 개막경기 시구 장면은 눈물겨웠다. 양쪽 다리가 없는 장애인 소년이 의족을 착용하고 미국인 양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을 던졌다. 언론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앞다투어 보도했고 보는 이들은 그 사진만으로도 가슴이 젖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신문 사회면 구석에는 우리나라 어느 인텔리 여성이 장애인 친자식을 목 졸라 살해하고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어떤 지식인들은 이 두 가지 일을 놓고 개탄을 한다. “미국의 부모는 외국의 장애인 소년도 데려다가 자식으로 키워주는데, 한국의 비정한 어머니는 친자식을 장애인이란 이유로 목 졸라 살해하다니 세상에 이런 인간 패륜이 있을 수가 있는가.” 그러나, 자식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비정함을 아무리 탓해도 우리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자식을 살해한 엄마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가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살아가기에 엄청나게 다른 환경과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장애인이나 노동자들처럼 죄 없이 고통을 당해야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우리 사회를 조금씩 평등한 구조로 바꿔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평등한 구조로 바꾸는 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이 역경에 처한 장애인과 노동자들에게 계속 “용기를 가지고 노력하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불굴의 노력으로 성공하라”는 충고는 어릴 때부터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훈련받아온 미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는 격언이 온 나라를 거의 도배하듯 덮고 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들리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에도 그런 충고는 어김없이 눈에 뜨인다. “고통이 클수록 영광도 크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부지런함을 배우라.”, “어둠을 뚫고 솟아나 세상의 빛이 되시오.” 참으로 산뜻하고 멋있는 표현일지 모르나 실제로 그런 일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의 초인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많은 것들을 부당하게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이 계속 보장될 뿐이다.


사회적 약자인 다수의 선택이 옳은 이유는 구조적 관점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개인의 인격과 교양과 지식의 수준과 무관하게 그들의 역사적 선택이 옳은 이유는 사회의 모순된 억압구조가 그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숲에 보면 키가 큰 나무가 있고 키가 작은 나무도 있다. 큰 나무가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커 버리면 그 키 큰 나무는 키 작은 나무에게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대립 구도도 마찬가지다. 키 작은 나무도 공평하게 햇볕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키를 키우거나 키 큰 나무의 햇볕을 가리는 가지를 조금 쳐 낼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숲의 구조가 더욱 평등해지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점점 확대돼 온 것이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가 진행해 온 방향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권리 주장이 어려운 사회


어쭙잖게나마 노동문제에 관한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기가 요즘처럼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임금 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처럼 지극히 당연한 요구조차 남 몰래 숨죽여 속삭여야 했던 80년대 암흑의 시대에도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박정희로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모두 여섯 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과거 그 어떤 정권에서도 지금처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기가 어려운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장애인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는 것 역시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에 유익한 진보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권리가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확대되는 것은 사회 전체에, 특히 한국 경제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조금 아는 척하는 헛똑똑이들은 영세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당연히 인상돼야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지금보다 적어지는 것이 한국 사회 전체에 유익한 길이라고 착각한다. 우리 사회 노동자의 권리는 정상화되기도 전에 다시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일까?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파업을 준비하고 있던 조종사들에게 “조종사로 취업하면서 ‘내가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모여 파업하게 될 것이다’라고 미리 짐작했던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파일롯트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노동조합이라는 단어가 나의 인생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라고 짐작했던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며칠 뒤에 구속될 것을 각오하고 파업까지 해야 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 세월 동안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가서 강연을 준비한 학생들에게 노동문제에 대한 강연을 준비한 취지를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한다. “대학생들도 국민의 한 사람인데, 노동문제를 이해해야지요.” 참 기특한 학생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자신들도 곧 노동자가 된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는 기색은 없다. 노동자가 되거나 적어도 노동자의 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넓은 아량을 가지고 이해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제도권 교육과 언론이 지금까지 학생들의 생각을 그렇게 조율했기 때문이다.


방송사에 신입사원 교육을 하러 갔다. 수백 대 일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신입사원들은 모두 명문대학교 출신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다녔던 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들이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서 져 본 적이 없는 그 신입사원들은 표정과 자세부터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 속에서 자신들이 곧 노동조합원으로 활동하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성장하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제도권 교육과 제도 언론을 통해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일방적으로 주입 받았을 뿐이어서, 자신들도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마저 상해하는 표정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언론 종사자 역시 노동문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배우며 성장했다는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게 언론 노동자가 된 사람들이 노동문제를 취재하고 보도한다. 방송사나 신문사 내부에서 노동문제를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하는 언론인들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편협한 세계관을 가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노동자가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운동 등에 대한 그릇된 혐오감을 수십 년 세월 동안 국민들에게 주입시켜온 사회다. 문제는 그 잘못된 시스템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그 어떤 제도권 교육과정에서도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게 성장한 우수한 인재들이 대기업 노무관리자가 되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노동조합을 탄압한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신성한 권리를 탄압하는 사람들이 죄의식조차 없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역사발전과정과 사회의 정체성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봉건사회 해체 과정에서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물적토대를 마련하면서 시민혁명을 경과하면서 자본주의로 이행했다.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해체한 이념의 기초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다. 시민혁명이란 현실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한 시민적 권리를 깨닫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역사 발전 과정에서 그 중요한 단계가 생략되었다. 일제 식민지라는 기형적 방식으로 중세 사회가 무너지면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되었다. 조선이라는 중세 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상실했다.

 

그 기형적 역사발전과정에서 실리를 택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사회 상층부로 진입하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다.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들이 도덕적 우월상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식민지’ 외에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하는 또다른 혹독한 조건은 ‘분단’이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이중의 악조건을 경험한 나라는 별로 많지 않다. 남북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은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분단’이라는 상황을 실제보다 더욱 과장함으로써 부정한 권력과 자본이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규제할 수 있는 이유를 합리화하는 데에 이용돼온 측면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제도권 교육과 언론의 역기능


공화국 시민의 권리의식을 함양하는 선진국 교육과정과 달리 우리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올바로 가르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매스컴의 정보 전달이나 간접적인 사회 경험 등을 통해 노동조합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단체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동’에 대한 아무런 개념 정리도 없이 노동자가 된다. 대부분 노동자가 되거나 노동자의 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은 제도권 교육과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 노동자들의 조직인 조합은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해소하는 중요한 준거 틀로서의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이제는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이다.



미래사회 노동조합의 전망


정보화가 진행되고 심화되면서 더욱더 전문화되고 개인화되는 시대에 과연 집단성을 띤 노동 운동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보화 사회가 진전될수록 전문직종, 고학력, 비생산직의 계층은 그 사회적 지위가 예전에 비해 더욱 상향되고 사회적 분포도는 더욱 넓어진다. 다만, 그러한 계층 구성원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되어 조직, 집단, 단체 등 㰡우리(We-ism)' 개념을 거부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인 차원이건 국내적 현실이건, 화이트 칼라의 노동조합 지향성은 갈수록 상승 곡선을 그린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역사는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모이는 노동자 계급의 지평이 갈수록 넓어지는 역사'였다.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도 이러한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를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지금의 고숙련 노동자들은 누구인가. 석사․박사 학위 노동자, 프로그래머, 영화를 포함한 멀티미디어 산업 종사자, 프로듀서․기자 등 언론 종사자, 벤처기업 노동자, 펀드 메니저, 연봉 1억이 넘는 골드칼라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착취당하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정보화 사회는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대량 수요를 창출하는데,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들의 특권은 점차 빠른 속도로 소실되고 있다. 하나의 작은 예로, Pan Opticon System('전감시체제' 또는 '범감시체제'로 번역하면 될 듯하다.)은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일하는 노동자를 완벽하게 통제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직원 한 명당 하나의 사무실을 갖고 한 없이 자유롭게 일하는 듯 보이나, 빌 게이츠는 한국에 와 있는 동안에도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하여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본사 말단 사원의 업무까지 직접 지시 감독할 수 있었다지 않은가...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두뇌 노동자이든 육체 노동자이든, 글자 그대로 생산 과정 전체가 '유리처럼 투명한 공장'이 되는 것이다. 이 '유리처럼 투명한 공장'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은 농촌의 읍사무소에서부터 대재벌의 빌딩까지 관철하지 않는 곳이 없다. 숙련된 노동자의 권력은 상승되지 않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고숙련을 요구받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기묘한 현상이 바로 새로운 정보화사회 노동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이 새로운 현상에 조응하면서 계속 발전할 것이다.




2. 단체교섭 투쟁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헌법과 노동기본권


노동기본권은 헌법과 법률 이전에 노동자가 갖는 당연한 권리이며 인권이다. 이것은 사회체제를 초월한 보편적․절대적 권리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불변의 권리이다. 노동3권과 관련한 헌법 제33조 [근로자의 단결권 등] 제①항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 체행동권을 가진다."는 규정은 국가가 노동자의 노동3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지, 헌법의 규정에 의해 비로소 노동자에게 노동3권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 제33조의 규정이 없더라도 노동자의 노동3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진국들 중에서는 헌법에 따로 노동3권을 보장하는 명문 규정을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헌법 제32조 [근로의 권리․의무 등, 국가유공자의 기회우선] 제①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 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없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살기 위해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과 같다.


다만 헌법에 노동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첫째, 그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명시하는 것이고, 둘째, 사회 각 계급이 각각 다른 입장과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노동법의 내용을 주장하거나 해석을 달리할 때 그 판단과 해석의 기준을 헌법에 규정하였으니 근거로 삼으라는 것이고, 셋째, 전체 국민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조합의 이야기를 헌법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노동3권의 내용


'단결권'은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단체교섭권'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개별적 교섭 대신에 노동조합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단체행동권'은 노동자들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 집단적으로 작업을 거부하는 등 실력 행사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 세 가지 권리는 '통일적 권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단체교섭권이 없는 단결권은 무의미한 것이며, 단체행동권의 보장이 없는 단체교섭권이란 종이 호랑이와 같다.



헌법에 노동3권을 규정한 또 다른 이유


우리 사회에는 일반적인 '노동조합 혐오'의 정서가 있다. 그 정서는 물론 권력과 자본이 제도권 교육과 주변의 환경과 메스컴을 도구로 만들어낸 올바르지 않은 정서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정서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어째서 법 체계 속에서 노동조합을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헌법으로부터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각종 특별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그 이유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결국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 그 동안의 역사를 통하여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노동자들에게 본능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다는 것은 좀 거창하게 말하면,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이다. 가치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고 그 상대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는 축소되는 과정 - 그것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길게 봐도 결국은 올바른 역사적 관점을 가진 계급이 올바른 전망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계급적 성격이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다른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 경영인이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신문을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은 대부분 권력과 자본의 이기적 노력의 결과들이다.


대우자동차 노조의 파업이 "정부와 기업의 잘못된 구조조정 정책에 쐐기를 박는다"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거나, 방송 노동자들의 파업이 "민주언론 쟁취"라는 고상한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일자리를 지키겠다"거나 "한 푼 더 받겠다"는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그러한 노력이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노동자 일반의 선택'이 '권력과 자본 일반의 선택'보다 우선하는 역사적 당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행위처럼 보는 시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3. 노동조합 활동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역사 발전과 경제


지금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많은 노력의 결론은 "경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사나 유복한 상인이나 시골 귀족의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든가 말 많은 철학이 아니 라, 2천5백만의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괴로움... 이런 것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혁명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룩한 이념은 굶주림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문제에 뒤따라 나온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역사와 경제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애써 부인하려는 노력이 최근까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에는 역사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했고, 20세기초까지도 역사는 '위인의 전기'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탁월한 한 역사학자조차 그들의 동료 역사학자들이 "역사상의 위인을 사회적 및 경제적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그 위인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자행했다"고 비난했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경제적 조건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들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온 과정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매년 하나씩 출현한 통치 이데올로기들...


'신경제' '국제화' '세계화' '신노사관계구상' '신자유주의' 이 모든 통치이념들이 모두 경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역사 발전의 방향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을 때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성경까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경우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던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2800년경이었으니 모두 5천년쯤 되었다고 본다.


5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역사는 신기할 정도로 한쪽 방향을 진행되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인류역사도 줄기차가 한쪽 방향을 지향했다. 그 방향은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자. 다만,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아두자.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고대 노예의 생활에 비하여 중세 농노의 생활은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에 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생활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어 온 것에 비하면 중세의 영주는 고대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 역시 중세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축소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는 사회 계급은 그렇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을 진행되었다. 그 방향이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역사발전의 방향을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시대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체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행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 진행 방향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문명사회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 나타나면 역사가 잠시 수십년쯤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역사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역사 담당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과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의 강물을 밀고 가는 활동에 자신감을 준다.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노동자의 인생을 보람있게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역사와 경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철학이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서 노동운동이 순탄하기만한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고통과 고뇌가 따르기 마련이다. 노동운동의 발전에도 일정한 자기 논리가 있다.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합법칙성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침체 가운데에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 없이 고양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인 발전을 준비한다. 침체국면을 지나 고양국면이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롤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고, 정치적 역량이나 이념도 굉장히 앞서나가게 된다. 노동운동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이루어진다. 임단투는 그런 합법칙성의 과정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4. 노동자 임금을 바르게 이해하자



임금은 노동력 상품의 가격이다.


근로기준법 제18조[임금의 정의]에서는 “사용자의 근로의 대상으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기타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일체의 금품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임금은 얼핏 ‘노동의 대가’처럼 보인다.


임금을 노동의 대가라고 할 때에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기업주에게 팔아서 돈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팔기 위해서는 ‘노동’을 팔기 이전에 이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노동’은 노동자가 평소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그리고 그 노동은 시작되는 순간에 이미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 되므로 생산된 모든 것 역시 자본가의 것이 되고 만다. 임금의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가들이 좋아하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가 합리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때 그 노동자가 얼마나 일을 잘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노동력’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임금을 결정한다. 즉, 자본가들은 그 노동자가 숙련 노동자인가, 미숙련 노동자인가 또는 힘든 일을 잘 할 수 있을 만큼 건장한가 아니면 허약한가에 따라 임금에 차이를 두고 있다. 임금은 ‘노동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노동력’이란 인간이 몸 속에 갖추고 있는 ‘일할 수 있는 힘’으로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모두 합한 것이다. 이 ‘노동력’이 발휘되고 소비되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노동’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만원짜리 재료가 이만원짜리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에 ‘노동’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생산한 막대한 가치 중에서 일부를 노동력 상품의 가격으로 받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계약의 체결은 ‘노동력 상품의 판매 계약’인 것이다 그런데 자본은 마치 노동자의 인격까지 산 것처럼 생각하고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임금이 노동의 대가처럼 보이는 이유


때때로 임금은 마치 노동의 대가처럼 보이고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것을 임금으로 모두 지불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 다음에 임금을 지불한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 모두 지불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둘째, 임금 액수가 노동의 량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8시간 이상 노동할 경우에는 그 초과분에 대해 잔업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에 노동자가 한 노동에 대해 모두 지불 받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실제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십만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노동자가 하루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서 하루 동안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용품의 가치이지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노동하여 생산한 가치가 십만원에 해당한다는 뜻은 아니다.



노동력은 실제 가치 이하로 팔리는 경향이 있다


노동력 상품의 가격(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하여,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계속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생계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에 자본가는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반면 노동자는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노동력의 가치가 점차 떨어지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가는 생산수단과 자본을 갖고 있으므로 자기 재산만으로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으나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가가 임금을 낮게 책정하더라도 사로 다투어 일을 하려고 함으로써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둘째, 자본주의 사회가 점차 발전하여 자동화가 진행되는 등의 이유로 실업자가 더욱 늘어나는 한편 이농 현상 등으로 도시에 직장을 구하는 노동자의 수는 더욱 늘어나 일자리를 구하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보통 물건을 사고 팔 때는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흥정을 하여 물건값을 결정하지만 노동력 상품의 경우에는 사는 사람(자본가)의 입장이 파는 사람(노동자)보다 유리하므로 노동력의 가치가 공정하게 결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임금 인상에 대한 몇가지 거짓말


임금이 인상되면 물가가 오르고 그에 따라 실질임금이 떨어지게 된다는 거짓말이 한 동안 잠잠하더니 경기 회복을 앞두고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사실 그동안 IMF 체제를 맞아 한국 노동자 임금의 절대금액이 줄어들었으니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정부의 각 부처와 한국개발연구원 등에서는 임금 인상 시기만 되면 “높은 임금 인상률은 비용과 수요 측면에서 모두 물가를 올리는 경향이 있다.”고 강조하기 시작한다. 임금이 오르면 생산비가 늘어나고,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져서 수요가 늘어나 결국 상품 가격이 오르고, 통화량이 증가하여 화폐 가격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거짓말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품 가격 가운데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그 비중이 약 10%라고 할 때 임금이 10% 인상되면 상품 가격 반영율은 0.7%에 불과하다. 그것도 다른 생산비의 감소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권력과 자본은 임금이 10% 인상되면 물가도 10% 인상되는 것처럼 엄살을 부리고 있다.


둘째,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지고 수요가 늘어나 가격이 상승한다는 주장도 상품의 생산량이 도저히 증가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가정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실제로는 수요가 늘면 판매량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고정 경비가 줄어들고 자금 회전이 빨라져서 원가 인하 요인이 발생한다. 독점 재벌이 제품 가격을 높게 유지하려고 생산과 출하를 조정하는 것이 훨씬 더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셋째, 중화학 공업 등에 대한 무리한 중복 투자, 수출 지원을 위한 특혜 보상금, 대형 금융 사고를 메꾸기 위해 통화량을 증발시키는 것에 비하면 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따른 통화량 증가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통계수치에 의하면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을 일으키는 것보다 물가 상승이 임금 인상을 일으키는 힘이 4배 정도 강하다고 한다. 임금이 물가를 쫓아다니기에 바쁜 것이다.



생계비만큼 받아도 본전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생산비는 최저생계비이다. 최저생계비를 전부 임금으로 받는다 해도 노동자들은 이윤이 전혀 없이 본전으로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최저생계비에 모자라는 만큼은 최소한 인상해야 한다.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안정된 직장과 적절한 소득에 의해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큰 고통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교육), 필요한 곳에 편리하고 저렴한 값으로 다닐 수 있어야 하고(교통), 아플 때 큰 부담 없이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의료). 그리고 나이가 들었을 때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복지). 즉 개인적 소비의 수준만이 아니라 사회적 소비의 수준이 적절한 수준으로 만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노동자가 힘과 건강을 회복하여 다음날에도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자가 책임지고 있는 가족의 생활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일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육성할 수 있어야 하고, 직업을 상실하거나 퇴직한 후에도 노동력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그 비용이 보장되어야 하고,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문화 소비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실질임금은 유지되어야 한다.


물가가 상승되어 실질임금이 떨어진 경우 그 만큼 보충해야 한다. 그래야만 물가 상승의 피해를 노동자가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실질임금 수준이 유지된다고 해 봐야 결국 이전 수준의 생활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더 많이 일한 것만큼은 고스란히 반영되어야 한다.


기계는 절대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를 단순히 옮겨 놓을 뿐이다.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그만큼 더 일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자본은 생산성이 10% 향상되었다고 임금을 10% 인상하면 회사에는 남는 게 없는 것 아니냐고 거짓말을 한다. 생산성 향상분만큼 임금을 인상한다해도 기업주의 이윤 역시 그 비율만큼 고스란히 증가하는 것이다.



갈수록 가난해지는 노동자


노무현 대통령이 '대기업 노동자 기득권'을 비난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나라 사람 치고 “대기업 노동자들이 지나친 고임금을 받고 있으며, 고임금이 한국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같은 맥락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와 공무원, 교사들이 만일 임금인상 투쟁을 한다면 거의 매국노 취급을 받을 지경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과연 옳은 것일까?


“고졸 생산직 15년차가 연봉 5천만 원을 받는다.”고 지탄의 대상이 됐던 바로 그 대기업 노동자가 결혼 10 년만에 아파트를 한 칸 마련하고 사람들을 집들이에 초대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차를 한 잔 마시는 시간에 그 노동자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결혼한 지 10년쯤 된 그 노동자가 10년 전 신혼 때에는 출근할 때 안해가 따라나와 "여보, 일찍 들어와"라고 인사를 했는데, 요즘 일찍 집에 들어오면 안해의 곱지 않은 눈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 노동자가 좀 일찍 퇴근해 들어왔더니 안해가 "집안에 뭐 꿀 항아리라도 감춰놓은 거 있어? 왜 연장근로도 하지 않고 벌써 들어와? 해도 떨어지기 전에..."라고 반농담으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노동자의 임금은 10년 동안 산술적으로 몇 배가 인상됐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보다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임금이 인상돼도 노동자의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 기묘한 이유가 무엇일까? 몇 년 전 대우경제연구소가 '한국경제연구'라는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했을 때, 한 중앙일간지는 사회면이나 경제면이 아닌 1면 톱기사의 제목을 "소득 늘었으나 빈부격차 더 심해져"라고 뽑은 적이 있다. 노동자들의 소득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우리 사회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내용을 한 대기업 부설 경제연구원에서도 발표했다. 수출이 급신장되고 있음에도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서 소득이 아무리 많아져도 같은 기간에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졌다면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더 가난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아무리 많이 올라도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이나 이자 소득자의 불로소득이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20년 넘게 일한 노동자가 얻은 소득과 부동산투기를 한번 잘해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벌어들인 소득을 비교해보면 그 실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직장인들은 거의 없다. 교사나 공무원은 물론 대기업 관리직이나 임원이라고 해도 이 기형적 구조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사회 불평등 구조가 심화되는 이 현상을 바로잡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수출’이나 ‘투자’보다 중요한 ‘소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이 '성장잠재력 변동요인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소비’의 성장기여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소비’의 부가가치 유발계수가 '투자'나 '수출'보다 훨씬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의 의미는,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수출이나 투자보다 소비가 경제를 성장시키는 효과가 훨씬 크다는 뜻이다.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국민들이 쓸 돈이 없으면 우리 경제는 발전할 수 없다.


부유층의 소비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하루에 밥을 세 끼 이상 먹거나 비싼 모피코트를 몇 겹씩 겹쳐 입고 다니거나 골프를 동시에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즐길 수는 없다. 건전한 소비는 국민 전체에서 골고루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