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어는 언어다

수화도 언어다, 소통할 권리를 달라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8. 2. 13.

수화도 언어다, 소통할 권리를 달라

[기획] 차별금지법안 뜯어보기 (18) 수화

김철환
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한 청각장애인의 눈물

지난해 말, 차별금지법 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 청각장애인이 눈물을 보였다. 그는 지난 10월 법무부의 제정 움직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여 왔었다. 일부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압력에 굴복하여 수정된 법안이 공개되었을 때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었다. 그를 설레게 하고, 분노케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 준비 과정에서 삭제해 버린 ‘병력’ 등 7개 항목 가운데 ‘언어’ 항목 때문이었다.

사실 차별금지법안 준비 과정에서 삭제된 ‘언어’는 청각장애인의 ‘수화’의 언어적 권리를 염두에 두어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화’에 대한 차별만 완전히 해결된다면 청각장애인의 인권침해 문제 중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차별금지법안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 왔다.

사진설명수화를 언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한국농아인협회가 2003년 개최한 기자회견


청각장애인의 차별 현황

이 청각장애인의 말처럼 청각장애인들의 경우 음성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사회적인 차별이 무엇보다 심각하다. 단적인 예로, 현재 청각장애인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하여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있는 수화통역센터는 전국 140여개 정도이며, 이곳에서 근무하는 통역사가 400명 내외(2007년)이다. 하지만 등록 청각장애인(언어장애인 포함)을 19만 명(2007년 보건복지부 통계)으로 본다면 수화통역센터의 수화통역사 1인이 감당해야 하는 청각장애인 수가 500명 내외로 열악한 실정이다.

수화통역이라는 서비스 측면이 아닌 언어적인 측면에서 ‘수화’가 받는 차별 사례를 들어보자. 청각장애인 김 씨(광주시)는 산업재해로 오른손 손가락 3·4지를 절단하는 장해를 입었다. 그런데 산재로 언어기관이 문제가 생기면 1~2등급의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김 씨는 손가락이 잘려 수화 사용이 어렵게 되었음에도 10등급도 안 되는 수준의 보상밖에 받지 못했다. 김 씨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근로복지공단에 “비장애인과 달리 청각장애인들은 손을 사용하여 대화를 해야 하기에 비장애인이 손을 다친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므로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당했다. ‘수화’가 언어라고 하면서도 정책적으로는 아직까지 ‘수화’를 언어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차별이다.

인적서비스와 ‘수화언어’ 정책의 부족으로 생기는 청각장애인의 차별 외에도 청각장애인들이 ‘수화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일상적인 차별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화접근이다. 한국에서 유선전화는 한 가구에 한 대 이상 보유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유선전화 사용에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청각장애인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청각장애인들 사이의 전화통화는 물론이고 가족이나 주변인들 사이에도 전화를 통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유선전화 사용의 어려움은 청각장애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차별을 심화시키는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각장애인이 문자나 수화로 내용을 보내면 중계센터에서 비장애인에게 음성으로 전달하고, 비장애인의 음성은 청각장애인에게 수화나 문자로 실시간 전달해 전화통화가 가능하게 하는 통신중계서비스(TRS)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의 미비와 재정의 확보 문제로 이 서비스도 시범사업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미디어 접근도 마찬가지이다. 라디오 청취는 물론 텔레비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해부터 방송위원회의 지원으로 방송에서 수화통역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수화통역을 통하여 시청할 수 있는 방송은 제한되어 있다. 폐쇄자막방송의 경우도 지상파방송 4개사에 한정되어 지역 민방과 위성, 케이블방송은 시청이 어렵다. 더욱이 수능방송의 경우 교육방송(EBS) 교육채널에서 수화나 자막서비스를 하고 있지 않아 비디오나 웹을 통하지 않고는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들처럼 자유롭게 학원에서 공부한다거나 과외를 받는 것 또한 어려운 실정이다. 특수학교의 경우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교사들이 현장에서 수업을 하고 있고 이로 인하여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거나 기초적인 지식조차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또한 어렵게 대학을 들어간 경우도 학습지원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아 강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중도에 휴학이나 자퇴 등으로 학업을 포기하는 청각장애인 대학생의 경우도 30%(2002년 장애인학생지원내트워크 통계)를 넘어서고 있다.

청각장애인의 영상물 접근을 위해서 수화, 자막, FM보청기 지원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지원 정책이 전무한 실정이어서 유통되는 교육·교양용 영상물을 시청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 전부터 장애인영화제를 통하여 자막과 보청시스템을 서비스하고 있지만 일부 극장, 특정 영화에만 국한되어 한국영화를 제대로 관람하는 환경은 실로 요원하다.

청각장애인들은 1종 운전면허 취득도 제한당해 면허를 통한 직업 선택의 자유 또한 억압받고 있다. 현 도로교통법 시행령은 1종 면허를 취득하려면 보청기를 사용하여 40데시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관계 기관에서는 이런 규정의 근거가 청각장애인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수화를 사용하는 등 비장애인과 대화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운전과 청력, 운전과 의사소통 능력과의 상관관계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있다.

언어로서의 ‘수화’와 장애인차별금지법

앞서 열거한 차별 외에도 청각장애인들이 받는 차별은 많다. 청각장애인의 문제 등 장애인 차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장애계에서 추진해 왔던 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다.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장애계의 5년여 투쟁을 통해 지난해 4월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소기의 성과도 이루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행위를 금지하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은 사람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함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법은 6장, 총50조로 구성되어 있다.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내용들도 △제1장 총칙 △제2장 차별금지 △제3장 장애여성 및 장애아동 등 △제4장 장애인차별시정기구 및 권리구제 등 △제5장 손해배상, 입증책임 등 △제6장 벌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청각장애인들이 지난해부터 논란이 있었던 차별금지법안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수화’가 가진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수화’는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한 측면에서 기술되었을 뿐 언어적인 측면을 선언하고 보장하기 위한 내용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수화’를 언어적인 측면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초기에도 장애계는 ‘수화’를 언어로서 존중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원칙을 세우려는 노력을 진행했다. 법률 초안에 “수화는 독립된 언어로서 독자성을 갖는다”라는 법률 문구를 만들었던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문구는 정부와의 조율과정에서 부담을 느낀 보건복지부의 강력한 반대로 삭제되어 버렸다.

‘수화’ 소통권은 생명권이다

몇 년 전 경기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청각장애인이 불법노점을 했다고 부과된 벌금 7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자신이 운영하던 노점차량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인이 된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40만 원의 생활보조비를 받고 있었지만 한 달 방세 30만 원을 내는 것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4인 가족의 생계를 끌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경우 궁핍한 생계 문제도 목숨을 끊게 한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게는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의사소통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지인들을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법노점을 하면서 ‘불법’이라는 딱지에 늘 근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과 받은 벌금고지서가 마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날아 온 통지서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벌과금 고지서가 갖는 의미, 노동의 기회를 주지 않는 정부가 오히려 장애인에게 ‘불법’이라는 딱지를 매기는 ‘부도덕성’을 인지할 사전 지식이 그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들에게는 기초적인 상식도, 국민으로서 누리고 주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도 누군가 수화를 통하여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에게는 그가 세상물정을 모르는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전 지식이 없었고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그에게 고지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수화를 통한 보편적인 언어접근이 어려운 환경, 수화언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환경의 부족, 응급 시 수화로 상담하고 조언 받을 수 있는 기관의 부족 문제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음성언어가 아니라 수화를 사용하는 이들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은 정부,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 보편적인 일상의 정보를 수화나 대체수단으로 제공하지 않은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타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 그는 외쳤으리라. 또한 지금도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그와 같은 심정으로 외치고 있다. “자유로이 의사소통할 권리를 달라, ‘수화’가 하나의 보편적인 언어로 인정될 수 있는 정책을 만들라”라고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해 말 국무회의를 통과한 차별금지법안은 수정되어야 한다.
 
 ‘수화’가 언어로서 인정되고 언어적인 관점에서 청각장애인의 차별이 방지될 수 있도록 차별금지의 항목에 ‘언어’가 포함되어야 한다. 청각장애인의 ‘수화’ 소통의 권리는 의사소통을 할 권리를 넘어선 생명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