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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를 배우려면

수화(手話)냐 수어(手語)냐?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8. 6. 24.

수화(手話)냐 수어(手語)냐?

한달 전에 '낮은자의 행복' 편집부에서 내가 고정적으로 쓰는 수화칼럼에서 '수화'라는 어휘 대신 '수어(手語)'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고 아직 일반일들 사이에 '수어'라는 어휘가 생소한 점을 들어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수화'라는 어휘로 바뀌는데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낸 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화로 바꿔 달라는 편집부의 요청을 거절하고 수어라는 어휘의 사용을 고집하였다. 고맙게도 편집부에서는 나의 뜻을 존중하고 9월호에 '수어'라는 어휘가 그대로 활자화되어 나왔다.

언제부터 그리고 어째서 나는 '수어'라는 어휘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를 이 지면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영락농아인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지 올해로 7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안식년을 맞이하며 나는 2개월 짜리 휴가를 얻어 지난 5월 미국에 갔다가 7월에 귀국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옛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푼 것은 물론 여러 농아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특히 워싱턴 DC에서 거주하는 황창호 전도사와 리버티 대학에서 공부하는 장병락 전도사를 만나 거의 한 달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손짓 언어에 관한 문제를 놓고 의견 교환이 있었는데 황창호 전도사나 장병락 전도사가 수화라는 말은 바른 말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수어로 바꿔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나에게 동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농아인을 위한 인문계 대학인 갈로데 대학(Gallaudet University)에서 컴퓨터 인터넷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는 후배 김철씨를 그도 수어라는 어휘의 사용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아인을 아내로 맞은 관계로 농아인 세계와 수어에 대해 관심이 유달리 많은 임성기 박사가 황창호 전도사의 이웃에 살고 있어 황 전도사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황 전도사는 그 분도 수화라는 단어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귀뜸해 주면서 수어라는 어휘의 사용에 대한 나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당황하면서 숙고하기 시작했다. 여러 날을 두고 깊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나는 수화라는 어휘를 접어두고 대신 수어라는 어휘를 쓰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왜 나는 수화라는 단어 대신 수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가를 설명하겠다.

첫째, 농아인이 사용하는 모어(母語)인 손짓 언어는 엄연히 언어이기 때문에 수어라는 어휘가 타당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손짓 언어를 영어로 sign language라고 되어 있어 언어의 일종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수화라는 어휘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한국말을 한국어라고 하지 한국화라고 하지 않는다. 영국말이나 일본말 따위를 영어나 일본어라고 하지 어느 누구도 영화(英話)나 일본화(日本話)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농아인들이 사용하는 손짓 언어가 엄연한 언어라면 수어(手語)라는 말을 써야 옳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수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과연 그들이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다른 고유한 문법 체계 및 표현 양식을 지니고 있어 한국어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통사론적, 구문론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수어를 배우는 일반인들이 수화교실에서 배운 수어 단어들을 한국어 문장대로 나열하기만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고 농아인과 대화할 때 문장식으로 수어를 표현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서 수어가 아니다.

손짓으로 표현된 한국어(Signing Exact Korean)이지 농아인들이 구사하는 수어와 거리가 먼 것임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농아인들은 결코 한국어 문장식으로 수어를 표현하지 않는다.

소위 농식 혹은 농아식 수화라는 말이 바로 수어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어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 수화교실에서 수화를 배웠다고 해서 농아인들의 수어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지레짐작하다가 정작 농아인들의 현란한 수어를 보고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고 쩔쩔 매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게 된다.

영어가 한국어와 다른 것처럼,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문장식으로 표현하는 수화(Signing Exact Korean or Manually Coded Kroean)와 농아인들이 구사하는 수어(Korean Sign Language)와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그 중 중요한 차이를 꼽는다면 문장식 수화는 딱딱한 느낌이 드는 반면 수어는 부드럽고 현란하다는 것과 문장식 수화 표현은 한계성을 느끼지만 수어는 표현이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식 수화표현은 눈을 피곤하게 또는 졸리게 만들지만 수어는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한문으로 볼 때 수화라는 말은 손짓 언어와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수화라는 한문을 보면 손 수(手)와 이야기 화(話)로 되어 있는데 그 중 話라는 한문을 보면 말言과 혀(??)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결국 '話'라는 한문은 혀로 말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 손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수어의 독특한 표현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게는 수화라는 말이 '손짓회화'라는 인상을 준다.

넷째, 농아인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수어라는 어휘가 낫기 때문이다.

수어에서 '어(語)'라는 한문을 보면 말言과 나吾로 결합되어 있다. 한국어와 구별되는 고유하고 아름다원 언어인 한국수어를 창조한 농아인들의 자좀심을 세워주는데 수어라는 말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을까?

다섯째, 수화라는 말은 구화의 대비(對比)로 사용된 말인 만큼 언어로서의 가치를 못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일찍 구화교육이 인기를 끌 때 입으로 발음하도록 훈련시키는 구화교육이 보통 농아인들이 구사하는 손짓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화와 대비시키기 위해 수화라는 어휘를 사용한 듯하다.

결국 수화는 손짓으로 한국어 문장을 직역한 표현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렇게 되면 수화는 언어라기 보다는 한국어의 다른 표현 양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화는 어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이미 설명한 대로 수어는 한국어 문장을 손짓 어휘로 직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어를 한국어 식으로 표현하면 우스꽝스러운 말이 되는 것처럼 ("나는 학교에 간다"는 말의 영어를 한국어 식으로 표현하면 I school to go가 되는데 이는 엉터리 영어가 된다.) 수어를 한국어 문장식으로 표현하면 어색할 뿐 아니라 보통 농아인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음성으로 한국어 문장을 표현할 수 있어도 손짓으로 한국어 문장을 직역하는 것(transliterate)은 무리임을 이해할 때 수화라는 말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수어를 배울 때 한국어 문장 표현대로 사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농아식 관용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수어를 숙달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한국어와 한국수어는 서로 다른 문법체계와 표현 양식을 가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위와 같이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수화라는 어휘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설명해드렸다. 수어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이해할 만하나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다.

우리는 해마다 수많은 신조어를 만난다. 시대의 필요가 이런 신조어들을 낳는 것이다. 우리 손짓 언어가 언어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한 까닭에 수화라는 단어가 수십년 넘게 사용되어 왔을 뿐이지 이제는 언어로서의 대접을 받을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다면 응당 수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독자 중에 수어가 엄연한 언어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화라는 단어를 고수해도 상관없다. 만일 수어가 언어임을 인정하는 독자라면 앞으로 수어라는 어휘를 사용해 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수어(手語)만세!

강주해 / 영락농인교회 담임목사, 낮은자의 행복 1998 10월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