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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전망IN

'혁신의 힘'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6. 11. 23.

혁신의 힘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민주노조운동, 희망과 비극

지난 4월 2일 총파업 철회와 발전노조 교섭 타결과정은 현시기 민주노조운동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의 실체를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총연맹 상층에서 대공장 단사노조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운동의 도처에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이른바 “노조관료”들의 배신 행동이 점차 전형적인 패턴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끊임없이 분탕질을 해대는 노조관료들의 행태 속에서도 거듭 투쟁의 길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이제 한편으로는 극심한 분노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에 휘말리고 있다.

4월 2일 직후 민주노총은 거의 무정부적 상태로까지 내몰렸다. 순식간에 지도력의 중심은 흩어져버렸다. 배신적 행동에 대한 규탄과 비난이 쏟아져 나왔고,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새로운 지도력을 창출하고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하고자 하는 희망은 파벌들의 이전투구로 대체되었다. 일시적으로 기우뚱거리던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미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노조관료제의 도움을 받아 곧 무게중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 능숙하게 파업이라는 무기를 꺼내든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파업, 총파업, 총력투쟁이라는 무기는 “함부로 가지고 놀다 망가지는 장난감”의 처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분투하는 동지들은 희망과 용기를 갖고 꿋꿋하게 투쟁을 조직하려 하지만, 거듭 되풀이되는 무원칙한 “극적 타결”, “총파업 철회”를 겪으면서 점차 민주노조운동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처음부터 이처럼 무기력하고 무원칙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노조의 등장은 노예처럼 짓눌리며 묵묵히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등불이었다. 더이상 과거처럼 체념과 굴종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결하면 힘을 얻었고, 투쟁하면 전진할 수 있었다. 87년 대투쟁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리를 완벽하게 쟁취하고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는 대안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전체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 투쟁을 위한 첫 발걸음으로써 훌륭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더이상 희망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아직 투쟁의 대열에 뛰어들지 못한 채 자본가들의 횡포에 휘둘리는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는 여전히 희망으로 남아있지만, 이미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는 이 희망을 조각내는 비극들이 발생하고 있다. 전체 노동자들의 의지를 대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직된 총파업들은 빈번히 위로부터 무산되어 왔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기 위해 발악하는 동안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을 사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의 이면에는 정규직 노동조합들의 숱한 외면과 배신이 놓여 있다. 대공장 노동자들과 계열사 하청 노동자들의 긴밀한 단결과 연대는 거의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함께 투쟁한 동지였는데도 여성 노동자라는 이유로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들과 장애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의 대열에 함께 하는 데에서조차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다.

이처럼 투쟁하는 노동자의 희망이 되어야 할 민주노조운동은 오늘날 희망과 비극의 두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두 얼굴을 하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민주노조운동 내의 비극이라는 얼굴을 가차없이 도려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이 노동자의 희망이 되고, 노동자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튼튼한 도약대가 될 수 있도록 분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운동 내에 등장하는 비극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실체와 뿌리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타협주의, 단사주의, 실리주의, 투쟁 회피주의, 정규직 이기주의 등 여러 현상으로 나타나는 현시기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적 약점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실천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의 원천

비극의 원천. 이것은 무엇보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민주노조운동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 노동조합 자체가 갖고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흩어져 있던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굴종하며 지내던 노동자들을 투쟁의 길로 인도한다. 요컨대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위한 최초의 진지가 된다. 이 측면이 강화되면 될수록 노동조합은 조직된 일부 노동자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을 포괄하며 투쟁을 지휘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것이 하나의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의 이익이 아니라 당장 조직되어 있는 소수 노동자만의 이익을 대변하고, 투쟁을 배제한 채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사장들과 협상을 벌이는 타협의 수단으로 굴러 떨어질 가능성이다. 전자는 단결과 투쟁을 강화하는 방향이고, 후자는 또다른 방식의 분열과 굴종을 낳는 방향이다. 그런데 대체로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일단 임금, 고용, 작업환경 등의 사안에서 보다 나은 조건을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되기 때문에 후자의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

물론 노동조합이 단결과 투쟁의 길로 갈 것인가, 또다른 분열과 굴종의 길로 갈 것인가는 미리 예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경향이 다수의 대중들을 획득하는가에 따라 노동조합운동은 전면적인 단결과 투쟁의 길로 전진해갈 수도 있으며, 부분적 이익에의 매몰과 타협의 길로 갈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운동은 이미 후자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과거에 부분적인 현상으로만 나타나던 노조관료제는 이제 상당한 범위로까지 확대되었다.

오늘날 노조관료로 비난받는 자들이 처음부터 관료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권용목, 이갑용, 단병호 등 여러 인물들은 주요한 투쟁의 중심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들은 대중들 앞에 “투사”로서 등장했다. 그런데 과거에는 “투사”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점차 현장 대중으로부터 분리, 독립해나가고, 전체 노동자의 분노와 의지를 대변하며 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개별 자본가, 자본가단체 및 정부와의 협상을 담당하는 “교섭 전문가”로 변해왔다. “협상”이 이들의 “직업”이 되었다. 이들은 교섭력을 높힌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자신의 통제 속에 꽉 붙들어 놓는다. 노조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정도로 투쟁이 확산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생활의 기반이 되는 조직이 격렬한 투쟁의 풍랑 속에서 요동치고 교섭 자체가 파탄나면 결국 직업적 교섭 전문가로서 노조관료 자신의 안정적 지위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일정한 수준의 투쟁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과 투쟁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본가들이 노조관료들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조관료들은 한편으로는 과감한 투쟁을 선포하고 약속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약속을 파기하고 투쟁을 회피하는 모습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노조관료라는 본성상 말과 행동을 달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노조관료들은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



노조관료제와 노동조합주의

그 뿌리는 민주노조운동이 “노동조합주의”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조합 투쟁들은 전반적으로 임금인상투쟁(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을 얼마에 팔 것인가를 결정하는 투쟁)이나 고용, 작업환경, 복지 등 자본가 사회에서의 노동조건을 둘러싼 투쟁(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정도를 완화하기 위한 투쟁)에 제한되어 있다. 이렇게 투쟁의 전망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격렬한 투쟁도 결국에는 자본가와의 협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노동조합들이 일반적으로 전개하는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 생활상의 요구를 둘러싼 투쟁은 노동자 투쟁의 최초의 발걸음으로서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투쟁이다. 그런데 이런 필수적인 투쟁들이 노동해방의 전망, 즉 “세상을 바꾸자!”라는 구호가 표현하는 원대한 전망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들을 칭칭 옭아매고 있는 자본의 사슬을 가차없이 끊어내는 투쟁이 아니라, 이 사슬이 노동자들을 너무 꽉 조이지 않도록 느슨하게 하는 투쟁에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필수적인 투쟁이기는 하지만, 이런 투쟁에만 제한된다면 노동자들을 고통스런 삶으로 몰아넣는 자본가 사회는 결코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투쟁은 끊임없이 반복되기만 할 것이다.

노동조합을 이런 제한된 전망에만 국한하려는 경향이 곧 “노동조합주의”다. 노동조합주의가 번성하게 되면,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투쟁에 나서게 하며 노동해방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최초의 진지”로서의 위대한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노동조합주의에 물든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조금만 격렬해지더라도 그것이 자기의 고유한 권한인 “사장들과의 교섭”에 방해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행동과 투쟁에 대한 지도부의 통제가 시작된다. 물론 자본에 맞선 투쟁은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규율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주의 지도자들이 바라는 것은 “질서정연하고 위력적인 투쟁”이 아니라 “순탄한 교섭을 방해하지는 않을 온순한 투쟁”이다. 그렇게 해야만 교섭 전문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권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노조관료제는 노동조합주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노조관료제가 자라나는 실제 과정은 이처럼 단순하게 정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가 집단과 정부로부터 “노동자들을 잘 다루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교섭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노조관료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투쟁을 파탄내고 노동자의 권리를 팔아넘기는 행동을 해왔다. 이런 행동들은 항상 대중의 항의와 분노에 직면하곤 했다. 그렇지만 노조관료들은 이와 같은 반발 속에서도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해왔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점을 밝히는 것은 노조관료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넘어 새로운 혁신의 힘을 창출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다룰 문제는 “대중의 수동성”에 관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조관료들이 절박한 투쟁의 확대를 어떻게 차단하는지, 사활적인 권리와 요구들을 어떤 식으로 팔아 넘기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격분한다. 그러나 노조관료들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지도부, 즉 더욱더 투철하고 전투적이며, 대중의 요구와 투쟁에 뗄레야 뗄 수 없이 긴밀하게 결합하며,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하며,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대중의 권리를 팔아넘기지 않으며, 싸워야 할 때 사생결단의 각오로 싸워나가며 대중의 투쟁을 독려할 수 있는 그런 지도부를 세워내기 위한 광범한 운동은 아직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의 토대를 이루는 대중들이 아직 자신을 이 운동의 능동적 주체로 성장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아직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대중을 과감하게 이끌어갈 선진노동자 대열조차 견고하게 조직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결과 노조관료들의 배신에 치를 떨고 격분하지만 이내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수동성의 뿌리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노조관료제의 등장과 성장 과정

첫째, 민주노조운동 내에 만연해 있는 패배감이 있다. 어쩔 도리가 없다, 해봤자 안된다는 패배감이 대중의 능동성이 꽃피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력부대를 이루었던 대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런 패배감이 이유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이 점차 무기력해지면서 자본의 현장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투쟁조차 신속하게 전개하지 못하는 대규모 사업장들,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지하철 등을 보자. 과거에 이런 대형 사업장 노조들은 대단히 전투적이고 활력이 넘쳤으며, 항상 굵직한 투쟁들의 한복판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중추를 이루었던 대공장 노동조합들은 이제 노조관료제와 노동조합주의의 핵심 진지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거듭 반복되어온 “패배의 역사”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과거에 이런 사업장 노조들은 전투적이고 활력이 넘치기는 했지만, 그 전투적 활력을 노동조합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정도의 역동성과 철저함으로 밀어가지는 못했다. 가령 80년대 말을 전후한 시기에 지역과 업종의 벽을 뛰어넘은 위대한 단결과 연대의 기억들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단결과 연대를 가장 광범하게 조직하는 데 실패하거나 또는 자기 사업장만으로 시야가 좁혀지면서 연대를 포기하는 일들도 일어났다. 90년 현중 골리앗 투쟁과 연결된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의 물결, 이 물결에 뒤이은 현자노조의 이탈과 배신에 의한 투쟁전선의 붕괴가 그 전형적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례들이 수 차례 반복되면서, 연대의 정신이 암암리에 깎여나갔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이 포괄하는 조직적 범위가 확장되면서, 전투적 단결과 연대의 기풍이 취약했던 사무, 금융, 언론 계열 노조들의 후퇴적 경향이 민주노조운동에 스며들었다. 예컨대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단결의 범위를 더욱 넓게 확대한다는 표면적 긍정성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 합법화를 위해 스스로 당시의 절박한 투쟁의 예봉을 꺾어버리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투쟁의 정신이 살아있는 단결”을 성취하는 것과는 다른 길로 나아갔다.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비전투적 부류들은 노동조합운동이 “지나치게” 투쟁적 성격을 띠는 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대의”만을 추구하며 소모적인 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실리주의의 다음 발걸음은 단결과 연대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그간 전투적 기풍을 유지해왔던 노동조합들까지도 “우리만 나서서 피흘리지 말자”, “우리도 우리 살 길을 찾자”며 연대의 정신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무기력하게 각개격파당하는 것이다. 단결과 연대를 포기하고서, 즉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투쟁의 힘을 전부 동원하지도 않고서 자본의 탄압을 분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패배는 당연했다.

투쟁 회피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것 봐라! 싸워봤자 깨지지 않느냐! 이제 더이상 무모하게 투쟁과 연대에 나서지 말고 적절하게 타협하고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패배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대중들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전투적 노동자들조차도, 이미 등장하기 시작한 노조관료들의 “노동조합주의”적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새로운 지도부로 세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새롭게 집행부를 장악한 경우에도 결국에는 약간의 전투적인 색채가 가미되었을 뿐 기존의 노조관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갔다. 과도하고 무모하게 투쟁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더 위력적으로 투쟁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점, 단결과 연대에만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더 광범하고 튼튼한 단결과 연대를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탄압을 이겨낼 수 없었다는 점, 교섭 담당자들의 “권한”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투쟁동력을 전면적으로 끌어올리기는커녕 가둬놓고 통제하려 했기 때문에 교섭조차 힘차게 밀어부칠 수 없었다는 점 등이 충분히 설득력있게 해명되어야 했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준비된 세력이 없었거나, 힘이 부족했다. 선진노동자들은 조합원들에게 가해지는 관료들의 영향력에 맞서 단결과 연대, 투쟁의 깃발을 사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중들의 패배감과 수동성에 압도당해갔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은 노조관료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안착시키기 위해 “싸우면 피해만 입는다”는 주장을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하고 의도적으로 널리 퍼뜨리면서 노동자들의 패배감을 부풀렸다.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 따위가 그 대표적 표현일 것이다.

둘째, 87년 이래 크고 작은 치열한 전투를 겪어온 자본가들은 더 이상 강압적이고 군사적인 탄압만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을 무력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투쟁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포섭책동을 강화했다. 한편으로 교활하고 비열한 현장통제와 함께,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개량의 떡고물들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임금과 복지수준이 상승했다. 연봉 수천만원을 넘나드는 노동자들과 월 8~90만원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에 대해 느끼는 절박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돈으로 길들여지기 시작한 대공장 노동자들은 특히 최근 몇 년간 굳이 필사적인 투쟁을 조직하며 자본가들과 격돌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 결과 민주노총 총파업이 대대적으로 조직되는 상황에서도 대공장 노조들에서는 구색을 맞추기 위한 “4시간짜리 파업” 이상을 조직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조차 가볍게 철회하는 경우들이 발생하고 있다. 대우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정도가 예외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상층 노동자들의 경우 투쟁이 절박하게 요구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은 점차 자본과의 협상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협상 위주의 활동이 전면화되면 될수록, 그런 업무를 직업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노조관료들의 입지는 필연적으로 강화된다. 더욱이 이들은 조합원들보다는 사장들, 관리자들과 더 자주 만나고, 현장을 방문하기보다는 자본가들이 베풀어준 안락한 장소와 향응을 즐기는 데 익숙해져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점차 자본가적인 사고방식과 정서에 강하게 영향받으며, 물들어갔다. 현장 조합원들과의 간극은 더욱더 넓어져 갔고, 마침내 현장으로부터 독립해 그 위에 군림하며 전체 조합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노조관료제가 뿌리를 내린다. 즉 수 차례의 커다란 패배들 속에서 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한 노조관료들은, 노동자의 상층 일부에게만 일시적으로 허용된 개량의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번성하고, 안착해온 것이다.

이제 이들이 대부분의 중심적인 대사업장 노동조합들을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형 노동조합들의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이용하여 상급 연맹과 총연맹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른다. 예컨대 금속연맹과 현자노조의 관계, 공공연맹과 한국통신노조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에 따라 주요한 투쟁의 계기들마다 일정한 패턴이 작동한다. 비상한 시기가 닥치고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거세지면 연맹과 총연맹은 명분을 위해 “총파업을 선포”한다 ; 주력부대인 대공장 노조 지도부들은 은밀한 또는 공공연한 방식으로 동원을 거부한다 ;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총파업은 철회된다, 또는 돌입 직전에 무산된다 ; 연맹과 총연맹은 “동력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 아래로부터의 비난과 항의가 쏟아지지만, 새로운 지도력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항의와 분노는 쉽게 꺾인다 ;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분투했던 현장 간부들의 지도력과 권위는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며, 체념과 패배감이 대중들 사이에 확산된다 ; 이것은 수동성의 심화로 이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노조관료제는 더욱 강화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노조관료제는 민주노조운동을 넝쿨처럼 휘어감으며 투쟁의 전진과 성장을 가로막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노조관료들의 투쟁 회피와 타협주의가 전면화되는 과정은 동시에 이에 대한 항의와 반발이 증대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항의와 규탄의 시도들은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할 수 있는 능동적인 역량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일시적 분노의 표출에 그치곤 했다. 사태는 곧 “정상화”되고, 노조관료제는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노조관료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단순한 분노와 항의로는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노조관료제가 등장하고 번성하게 된 원인들과의 연관 속에서 검토한다면 몇 가지 논점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민주노조운동의 저변에 깔린 채 점차 확대되고 있는 패배의식과 그 결과물인 수동성을 극복해야 한다. 대중들 사이에 유포된 패배의식과 수동성을 제거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라”고 호소함으로써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들을 일으켜세우기 위해서는 노조관료들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력이 조직되어야 한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조합의 관료화에 분노하고 단호한 투쟁이 전개되기를 바라는 선진노동자들 자신이 하나의 대열로 결속되어야 하며, 노조관료들에 의해 통제되는 방식의 투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투쟁들을 조직하고 이끌어야 한다. 전면전이 아니더라도, 사안에 따라 현장에서 즉각적이고 부분적으로 라인을 멈추는 정도의 투쟁들은 충분히 가능하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함만 있다면 노조관료들의 지침과 통제를 뛰어넘는 자발적 행동의 불씨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하나 하나의 투쟁들을 진실하게 책임지고 철저하게 밀어부친다면 이 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선진노동자들은 곧 조합원들의 대중적 지지와 신뢰를 받는 새로운 지도력으로 떠오를 것이다.

물론 이런 투쟁들을 조직하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의 투쟁을 조직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현장의 주도권이 뒤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노조관료들의 한계와 해악을 대중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 것이며, 선진노동자들이 자신을 “혁신의 힘”으로 단련하고 성장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선진노동자들이 대중들의 패배의식과 수동성을 뚫고 단호하게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더욱 치밀해져야 한다. 그간의 패배들을 낳은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그간의 투쟁에서 어떤 실책들이 발생했는지,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준비와 투쟁 방향이 요구되는지 각 사업장의 구체적인 경험들 속에서 검토하고, 교훈을 끌어내며, 실천과제들을 정립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준비되지 못한다면 선진노동자들은 대중들 사이에 떠다니는 패배주의와 수동성에 함께 젖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노조관료들의 영향력에 정면으로 맞서며 대중의 힘을 끌어모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조직들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지금은 파업 시기에조차도 점차 취약해져가고 있는 민주노조 선봉대, 규찰대, 정방대, 사수대 등 단결력과 투쟁력을 아래로부터 강화할 수 있는 활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해야 하며, 가장 투철한 선진노동자들이 이런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감으로써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대안으로 성장해가야 한다.

이런 활동의 의의는 투쟁사업장들 간의 연대에서도 드러난다. 동일한 시기에 근접한 지역에서 투쟁이 전개되는 경우 자연스럽게 투쟁사업장 공동 행동이 모색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공동 행동이 직접적인 투쟁 위주로 조직되기보다는 집회 일정에 대한 협의나, “품앗이” 형태의 상호지원 위주로 조직됨으로써 서로 다른 사업장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와 결의를 하나의 깃발 아래 단단하게 결속시키지 못하는 약점을 보여왔다. 이것은 투쟁사업장들 자신의 투쟁의 힘으로 상황을 밀어가기보다는 상급단체의 교섭력에 의존하는 약점과 연결된다. 물론 투쟁을 효과적이고 광범하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단위사업장들의 단결과 연대의 표현인(또는 “이어야 할”) 상급단체의 힘을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직접적인 투쟁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교섭의 효율성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면, 그 순간 실제로 교섭석상에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근본적 힘인 투쟁력의 강화라는 과제는 뒤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합원들은 투쟁 속에서 자신을 단련시킬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가장 전투적인 선진노동자들이 파업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게 된다. 대신 주도권은 교섭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료들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 뒤의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게 진행된다. 투쟁 조직력과 대담함이 결여된 교섭 전문가들은 파업 일정을 지지부진하게 이끌어갈 것이며, 그것은 투쟁 동력을 더욱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투쟁 동력이 떨어지면 교섭의 힘도 취약해진다. 노동조합의 요구는 점점 후퇴하고, 결국 형편없는 타협안으로 투쟁이 종료될 가능성이 증대된다. 투쟁이 이런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상급단체들의 역량을 결합시키되, 투쟁의 주도권이 교섭단이 아니라 현장의 투사들에게 이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교섭은 철저하게 투쟁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둘째, 패배의식과 수동성을 극복하고 능동성을 끌어올리는 과제는 단사노조에서 총연맹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연결고리가 끊기지 않고 원활한 “혈액순환”이 이루어지도록 재편하는 과제로 이어진다. 지금은 이 고리가 상당히 굳어있다. 상근 임원들이 노동자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하지 않거나 용납할 수 없는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에도 즉각 교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자리를 꿰차고 버티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소환되고 새로운 대표자로 대체되는 경우란 거의 보기 힘들다. 단사노조의 경우든 상급단체의 경우든 “임기를 마치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조합원들과 함께 호흡하며 민주노조운동에 진실하게 복무하는 태도”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이런 경향은 상근 간부와 현장 사이의 괴리를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노조관료제를 심화시키는 기초가 된다.

물론 이 문제는 현장과 괴리된 상층 대표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상급단체 대표자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은 기층 노동자들의 능동성과 의식, 활동력을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규모가 작은 단사노조나 상급단체의 경우, 새롭게 상근임원을 선출하려 해도 투쟁을 거쳐 아래로부터 성장해온 활동가를 발굴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 기존의 지도부가 정신이 살아 있고 민주노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현장 활동가를 양성하고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현장과 괴리된 관료의 위치로 서서히 이동해가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조합의 관료화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곧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상승시키는 활동들과 밀접하게 결합되어야만 한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조합의 대표라는 직책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임기를 마치면 현장에 복귀하는 것”, “대표자가 노동자의 요구를 철저하게 대변하지 않을 때 즉각 소환하고 새로운 대표자로 대체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으로 확립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무엇이 민주노조운동의 전망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앞에서 간략하게 다루었던 것처럼 노동조합주의적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결코 민주노조운동을 전진시킬 수 없다는 것이 나날이 명백해지고 있다. “조합적 이해관계” 즉 당장 노동조합에 조직되어 있는 소수 노동자들만의 이해관계를 대표하기 위해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외면하거나, 자기 사업장 또는 자기 지역 및 업종의 싸움이 아니라는 이유로 폭넓은 연대투쟁을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한 사업장 내에서조차 정규직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위해 미조직 하청노동자들을 자본의 공격 앞에 내버려두거나, “실리 추구”라는 명목으로 단기적 이득을 얻기 위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권익을 포기하는 모습들이 반복된다면, 민주노조운동을 희망의 운동으로 세워내는 일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이런 개개의 사안들 속에서 노동조합주의의 한계와 노조관료들의 책동을 낱낱이 드러내고 “단결과 연대, 투쟁”의 노동자 정신을 정확하게 대치시키며 우리 운동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실제 투쟁에서 등장하고 있는 혁신의 씨앗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제에서도 무(無)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혁신을 위한 투쟁을 밀어갈 수 있는 씨앗들은 부분적이고 미약하지만 이미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특히 200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비정규직 투쟁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투쟁의 가능성만이 희미하게 점쳐질 정도로 미약했던 비정규직 운동이었지만, 이제는 비정규직 투쟁을 빼놓고는 민주노조운동의 전망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최초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는 한라하청 투쟁을 필두로 한국항공우주, 롯데호텔, 이랜드, 볼보코리아, 한국통신, 방송사, 캐리어, 건설운송, 기아자동차, 학습지교사, 경기보조원, 집배원 등 모든 업종과 지역을 망라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투쟁하기 시작했다.

물론 비정규직 운동은 정규직 운동과 마찬가지로 전체 노동운동의 한 부분이고, 정규직 운동보다 특별하게 우월한 의미를 가진 운동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시기에 혁신의 힘을 이루는 한 요소로서 비정규직 운동에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외면과 방관,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규직 운동에 비해, 비정규직 운동은 초기 일부 활동가들의 편향을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을 강하게 요청하면서 계급적 단결의 정신을 정면으로 제기한다는 점이다. 이에 발맞춰 이미 롯데호텔, 이랜드, 신호제지 등 몇몇 사업장들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투쟁하는 모범들이 창출되고 있다. 더욱이 비정규직 철폐를 내걸고 투쟁해온 사업장 노조들은 오늘날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가장 단호하고 가장 전투적이며, 연대투쟁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온갖 악랄한 탄압 속에서도 굳건하게 전진해온 비정규직 투사들의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투쟁들은 기존의 침체된 노동운동에 강한 자극을 주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혁신되어야 하는지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곧 최근의 비정규직 투쟁들이다.

둘째로 중소사업장 노조 및 신규노조들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일부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개량의 시혜가 주어지는 동안에도,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 노동자들은 임금삭감과 정리해고, 직장폐쇄 등의 직접적인 공격에 시달려야 했고, 이에 따라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완강한 투쟁들이 조직되고 있다. 예컨대 금속노조의 일진아산지회나 시그네틱스지회의 투쟁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사업장들의 투쟁은 종종 끈질긴 장기항전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의 비타협적 의지와 분투는 수시로 싸움을 포기하고 굴종하며, 무원칙한 타협을 즐기는 노조관료들의 행태와 대비되면서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한편 신규노조들의 약진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최근에는 공공부문의 철도와 발전 등 그간 어용이 장악하고 있던 사업장에서 새롭게 민주노조가 건설되고 과감한 투쟁이 조직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와 더불어 마찬가지로 신규노조인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의 투쟁에서처럼 한 사업장의 파업을 지역 연대파업으로 확대시킨 모범적인 사례도 있다.

셋째로 노조관료제의 근거지인 대사업장에서 현장조직 활동 등의 방식으로 분투하는 소수의 선진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의 활동은 아직 전면화되지 못하고 그만큼 충분한 결실을 맺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대 자본의 가공할만한 현장통제와 노조관료들의 야합이 빚어내는 엄청난 압력 속에서도 꿋꿋하게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혁신의 힘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위에서 지적한 각각의 투쟁 흐름들은 그 자체로는 큰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왕성한 투쟁에 착수해야 한다는 자각도 매우 분명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흔들림없는 확신에서도 아직은 부족하다. 그 결과 비정규직 투쟁에서 애써 창출한 단결의 모범들이 흔들리기도 하고, 완강하게 전개되던 장기파업이 안타까운 패배로 끝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기존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적인 약점인 노동조합주의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상태다. 다시 말해 이 투쟁들은 아직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충분한 현실적 의의를 지닌 가능성이며, 현시기에 유일하게 희망을 보여주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을 현실로 발전시키는 것,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각각의 혁신적 요소들을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조직하는 것, 바로 이것이 단결과 연대, 투쟁의 정신으로 노동운동을 밀어가고자 하는 모든 동지들의 과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투쟁은 철저한 단결과 연대, 강렬한 투쟁의 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에 혁신의 방향을 보여주지만, 아직은 이 운동의 힘이 미약한 관계로 순탄한 전진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종종 투쟁들은 패배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 속에서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혁신의 전망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들은 어느 투쟁들보다 더 투철하게 단결하고 연대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승리했는가? 오히려 고통만 받고 패배해가지 않았는가?” 하는 반론을 제기한다.

물론 많은 투쟁들이 패배해왔다. 그러나 그 패배의 원인이, 이 싸움이 단결과 연대, 투쟁의 정신을 전면에 제기하고 실천했기 때문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싸움들은 단결과 연대, 투쟁의 힘을 더욱더 강하게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받았으며, 무엇보다 이 투쟁들을 진심으로 지원하고 함께 싸워나가야 할 정규직 운동이 침체되고 무기력하다는 점 때문에 제대로 전진할 수 없었다. 증거를 원하는가? 한통계약직 투쟁이나 캐리어사내하청 투쟁처럼 같은 현장에 조직되어 있는 정규직 운동으로부터 완벽하게 배척당하고 밀려난 경우 파업은 끔찍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반면 한국항공우주, 롯데호텔, 이랜드, 신호제지처럼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꺼이 비정규직 동료들과 운명을 함께 하고 같이 싸워나간 경우 투쟁은 훨씬 수월했으며, 온갖 고난 속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단결과 연대가 협소한 범위로 제한되었으며, 후자의 경우는 단결과 연대의 폭이 보다 넓게 확장되었다. 어떤 경우든 투쟁은 어렵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단결하고 연대하며 비타협적으로 투쟁해나간 파업만이 단 한 걸음의 전진이라도 보장했다.

이 점은 다른 모든 투쟁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규직 운동과 비정규직 운동을 단결시키는 것, 대공장 투쟁과 하청 중소공장 투쟁을 연결시키는 것,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 한국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장애노동자를 하나의 대열로 조직하는 것이 곧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힘을 조직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곧 우리 운동을 노동조합주의적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며, 계급적 단결을 성취해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