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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전망IN

<현장활동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2>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6. 11. 20.

<현장활동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2>


세상을 바꾸는 이념 정립을 위하여

- 새로운 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를 구현하자! -


정성희 민주노동당 기관지위원장


1. 들어가며


요즘 ‘이념’이라 하면,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이념이냐” “이념이 밥 먹여주냐”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중의 요구와 관심이 다양화되고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질서가  빈곤과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는데다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부추겨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탈이념 탈정치 경향이 강해진 탓입니다. 그러나 민중들이 이념과 먹고 사는 문제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정치권과 운동권의 책임은 없습니까? 아직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수구보수세력의 색깔공세에 식상한 것은 차치하고, 참여정부에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들의 ‘참여’가 없고, 집권당의 요란한 ‘개혁’ 구호에 실질적인 ‘개혁’이 없으며, 진보정치, 진보운동에 서민의 피부에 닿는 ‘진보’가 보이지 않음에 따라 생긴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념’이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사회적 ‘이념’은 바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공통된 생각의 집약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최고의 가치속에 먹고 사는 ‘밥’이 빠질 수 있습니까? 이념의 요체는 ‘밥’입니다. 그런데도 먹고 사는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냥 이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일반민중의 정서가 돼 버렸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외세와 재벌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거기에 저들의 밥이 있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850만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우리민중들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아직 뚜렷한 공통된 하나의 최고 가치, 즉 이념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외세와 재벌의 최고의 가치! 우리민중의 그 것은 무엇인가?


물론 이러저러한 이념의 편린들은 고민 많은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소수 활동가들의 구호나 주장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민중들이 생활과 실천속에서 함께 공유하는, 한마디로 압축된 과학적 ‘이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체적 견지에서 봤을 때, 이는 순전히 진보운동의 무성의와 무능력과 무책임 때문입니다. 군사독재시절의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해체되고 동구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면서 진보운동의 사상적 방황이 너무 길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자기 나름의 이념을 고수하면서 대중운동에 헌신해온 많은 활동가들도 그간의 경험을 총화하여 변화된 정세에 맞게 사상, 이론, 방법을 발전시켜 대중적으로 확산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외세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신음하는 우리민중들의 요구와 열망을 집약, 집중시킨 이념적 푯대를 세우고 민중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노동운동, 진보정치운동, 다양한 시민운동 등 진보운동 전반의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금 ‘운동의 위기’라 불릴 정도로 부실공사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더구나 직선제, 정권교체 등 일부 진전된 절차적 민주주의가 마치 민주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되는 87년체제의 한계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 이후 지난 10여년, 정국을 주도한 구 민주화세력들은 철학의 빈곤과 실력의 부족과 기반의 취약으로 제대로 된 민주개혁을 성취하지 못한 나머지, 민중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기고 급기야 ‘박정희 향수’까지 불러일으켜 민주주의 자체가 거부당하는 반동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여기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파로 갈수록 심화되는 빈곤과 사회양극화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제반 상황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새롭게 정립해 세상을 바꾸는 뚜렷한 이념을 구현할 것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념 없는 민중이 세상을 바꾼 예는 없어


세상을 바꾸는 이념을 확립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질적 도약을 기약할 수 없고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할 수도 없습니다.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념,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 단결되어 있지 않은 민중이 세상을 바꾼 예는 없습니다. 이념 없는 민중은 결코 사회변혁의 자주적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의 이념으로 똘똘 뭉칠 때, 민중들은 어떠한 간난신고(艱難辛苦)도 헤치고 승리의 고지를 향해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총이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투쟁을 예고하고, 민주노동당이 집권전략 수립을 계획하며, 6.15민족공동위원회에 이어 민중연대, 통일연대를 중심으로 단일 연대연합체 건설이 논의되는 이 마당에, 이제 더 이상 민중이 나아갈 이념적 좌표에 대해 등한시할 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에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먼저 이른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일부 신장된 우리사회의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에 숨은 반민주성, 반민중성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특히 밥, 자유, 평등, 평화, 생태, 인권, 소수자 보호 등 사람의 소중한 가치들을 모조리 유린하는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함성에 따른 새로운 민주주의이념으로서 지난 20년간 우리운동이 일관되게 견지한 정치강령의 집약적 표현이자 조직의 운영원리이며 민중의 삶의 철학으로서 ‘자주적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진보운동 일각에서 대안이념으로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가 현단계 이 땅의 세상을 바꾸는 이념으로 왜 적합하지 않은지를 검토하는 동시에 자주적 민주주의와 유사이념으로 사용되는 ‘진보적 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의 개념상 한계도 지적할 것입니다.


2. 자유민주주의의 기만성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30년 군사독재시절의 ‘민주 회복’ 또는 ‘민주 쟁취’ 요구는  엄밀히 말해 자유민주주의를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독재시대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이라 할 수 있는 1인 1표의 보통선거권, 다당제,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법앞에 평등, 평화적 정권교체 등이 여지없이 유린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반독재민주화운동안에도 “외세 지배의 고리를 끊지 않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그대로 남겨놓은 채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며,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야당이 정치적 중심을 이룬 당시 민주화운동의 일반적 수준은 군정 청산과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넘지 못했습니다.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87년 6월 항쟁은 이념과 노선, 중심주체, 민중의 준비정도의 한계로 인해 계속 발전되지 못했습니다. 민중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직선제 쟁취, 대통령 5년 단임제 채택에서 그쳤습니다. 이후 3당 야합에 뿌리를 둔 ‘문민정부’, DJP연합의 ‘국민의 정부’, 오늘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독재 잔재를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복원하는 87년 체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민주주의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자유경쟁 속에서 결정되므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관계가 속출하고, 다수 민중들은 실제 선택의 자유가 축소, 억제됨에도 형식적으로만 기회 균등을 보장한다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실제 먹고 입고 잘 자유도, 배울 자유도, 일할 자유도, 쉴 자유도 없는 것이 우리사회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민주주의란 글자 그대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겉으로만 만인의 자유지 속으로는 소수 자산가들만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좌민주주의라 부르고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라 혹평합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1인 1표로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나 의원들은 민중의 요구와 의사를 대변하지 않고 외세와 재벌의 입김에 놀아납니다. 빈부나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공직 후보로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후보 출마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모든 사업체와 업종산업, 지역에서 2인 이상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장들의 탄압과 정부의 수수방관으로 실제 노조를 만들기도 어렵고, 만들어도 유명무실화되기 일쑤입니다. 법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똑같이 처벌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이건희 삼성재벌회장은 막강한 정경언검 유착으로 구속되지 않고, 생존권 사수를 위해 몸부림친 순천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는 중형을 선고받는데 이어 다시 7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당합니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인 절차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더라 - ‘참여민주주의’의 실체 


자유민주주의가 자랑하는 선거 등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는 또한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차단하고 재벌 등 기득권자들의 사회경제권력을 교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을 합법화, 제도화시켜줍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민중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마땅한 과거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반인권 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정계, 교육계, 언론계 등 우리사회의 지도층에 진출시키는 합법적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정부패, 공안탄압의 대명사가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겠다고 돈과 지역주의를 무기로 국회의원이 된 사례가 그러합니다. 지금 지방의회의 실상을 보십시오. 말로만 ‘풀뿌리 민주주의’이지 지역토착세력의 볼모가 돼버렸습니다. 자치보다는 분권을 강조하고 중앙에서 이전된 권력을 지역주민들이 아니라 소수 기득권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돈 있고 빽 있는 자들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정치권력과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언론과 교육, 문화예술, 스포츠 등 모든 생활수단을 장악해 자신들의 입장이 마치 민중 전체의 이익인양 왜곡하는 조건에서, 어떻게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온전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사실은 투표할 수 있고 정당에 가입할 수 있고 비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등의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마저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사상의 자유를 억누르고, 그 연장선에서 종종 색깔소동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소수자의 인권 보호는 물론이고, 교사, 공무원의 단체행동권 불허, 필수공익사업장 지정 확대, 특수고용직의 노동자성 불인정 등 노동자들의 노동삼권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는 여전하고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이 오히려 심화되고 있으며, 이익집단과의 갈등을 생산적으로 조정하는 제도적 장치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특히 노무현정권은 ‘참여정부’를 자칭하며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참여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구호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정책심의 과정에 시민사회단체들을 형식적으로 참여시키고 자문기구 성격의 노사정위원회를 가동하는 이외에 민중의 일상적 참여를 보장하는 어떤 노력도 없었습니다. 합의사항의 법적 효력은 커녕,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는 노사정위, 농민의 불만을 몇 번 들어줄 뿐인 쌀 비준 후속대책 3자 협의기구, 합의를 깨고 교원평가제 시범 실시를 일방 강행한 교육부 산하 협의기구 등이 ‘참여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말해줍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더욱 심각한 것은 IMF경제위기 이후 자본의 위기 탈출을 위한 신자유주의가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냉혹한 시장논리가 작용하고 극심한 사회양극화를 초래해 약간 진전된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뿌리채 흔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 타개책으로 미국과 IMF의 권고에 따라 전두환 군사독재때부터 김영삼 문민정부까지 부분 도입되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화시켰습니다. 애당초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철학의 빈곤을 드러내며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을 소리높이 외쳐댔습니다. “경제를 살리자”며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서는 사실상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그에 결탁한 재벌들의 이해를 대변, 기간산업과 알짜기업을 팔아먹고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한 개방화, 민영화, 자유화, 유연화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수가 됐습니다.


‘개방화’는 상품과 서비스, 자본 등의 시장을 전면 개방해 우리경제에 대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경제정책 결정이나 경영의 자율성이 약화되고 국부가 과도하게 유출돼 실제 민생경제 돌보기를 어렵게 했습니다. ‘민영화’는 국공영기업을 외국자본이나 재벌에게 팔아 국가 기간산업을 사유화하고 소수 독점자본을 더욱 비대하게 살찌워 국가경제가 민생과는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자유화’는 모든 규제를 풀어 자유경쟁을 촉진하고 사적 소유권을 보장해 정글의 법칙대로 광범한 중소영세자본을 비롯한 중산층을 몰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그린벨트를 해제, 환경오염을 가중시켜 생태계를 파괴했습니다. ‘유연화’는 쉽게 쓰고 쉽게 자르는 자본측의 부담 전가방식으로서 850만 비정규직을 양산해 빈곤과 사회양극화를 촉진하는 신자유주의 대 노동자공세의 직접적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850만 비정규직, 400만 신용불량자, 100만 단전단수 가구, 716만 빈곤계층, 한해 교통사망자를 웃도는 1만3천여명의 자살자, 인간성 파괴의 무수한 범죄자, 식량자급률 26% 세계 최하위권, 서울 대기오염도 세계1위권, 상위1% 전국토의 40% 이상 소유 등의 신자유주의 결과물들은, 지금 일부 절차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전부로 간주하는 대다수 일반민중들로 하여금 모든 정당, 정치인을 불신하게 만들고 ‘밥’과 동떨어져 있는 ‘민주주의’ 자체에 염증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빈곤과 양극화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를 앞장서 추진한 정치세력이 냉전수구세력이 아닌 이른바 개혁세력, 구민주화세력이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실망이 급기야 ‘박정희 향수’ 와 ‘이명박 신드롬’을 낳는, 역사 반동의 기운까지 감돌게 하는 상황입니다.     


노동운동 위기, 기업별 노조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안주한 탓


신자유주의의 여파는 또한 노동조합운동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꾸준히 성장한 노조운동은 노조 결성, 단체 교섭 및 협약 체결, 합법적인 쟁의, 노조 집행부, 대의원 선출 등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습니다. 노조의 합법화, 제도화는 노동자의 힘을 강화시킨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기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지고 조합원들이 고용불안에 떨며 개인주의, 이기주의 성향이 커져갔습니다. 그럼에도 노조 간부 및 활동가들이 임단협의 제도화와 조합내부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안주, 조합원들속으로 깊이 들어가 자주의식, 산업별 의식, 계급의식을 집중적으로 높이고 기업별 노조를 제 때에 산업별 노조로 전환하지 못했습니다. 또 간부, 활동가들이 관성과 형식주의를 떨치고 앞장서 실천적 모범을 보임으로써 현실에 안주하고 개별화되는 조합원들을 노조 활동의 자주적 주체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자본측은 자신의 위기 극복을 위해 제국주의 독점자본-대자본-중소영세자본으로 부담을 전가하는 과정에서 대기업 노동자는 조금,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는 많이, 비정규직 노동자는 더 많이 착취해 노동자간의 차별을 심화시켜놓고서도 대기업 노동자의 고임금과 배부른 투쟁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런데도 대기업노조는 매년 되풀이되는 공장안의 임단투에 머물러 본의 아니게 노동계급 내부의 양극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제 일상활동, 일상투쟁과 현장조직력도 예전에 비해 많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공기업 노동자들도 민영화 이후 효율성, 경제성 일변도의 경쟁원리에 따라 실질임금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노동강도가 세지고 고용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사무전문직도 구조조정과정에서 명예퇴직, 조기퇴직 등의 고용불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임시직, 계약직, 시간제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는 훨씬 가혹합니다. 회사문 닫기가 다반사, 대량 실직 위기가 항시 대기하고 있고 계약 해지의 위협속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참아내고 있습니다. 화물운송, 레미콘, 학습지 등 특수직 노동자 등은 아예 근로기준법상 보호의 사각지대에 방치돼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별 노조체계의 임단협, 쟁의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노조 간부, 활동가들부터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꾀뚫고 높은 자주의식, 공동체의식, 변혁의식으로 무장하며 조합원들의 의식과 단결력, 투쟁력을 끊임없이 높여 산별 노조를 내실있게 완성하고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설령 기업별노조를 산업별노조로 전환하더라도 현장조직력은 공동화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내재한 채 산별 요구-산별 교섭-산별 투쟁의 제도화라는 또 다른 절차적 민주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3. 세상을 바꾸는 이념 : 자주적 민주주의

 

앞서 얘기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경제에 기반한 부르좌민주주의로서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제약하는 ‘배반의 장미’입니다. 참여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할애비 같은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만성을 가릴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입니다만, 소수 자본가들이 즐겨 부르는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민이 주인인 민주주의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민주주의는 역사적 단계와 나라에 따라, 계급계층에 따라 제각기 다른 수식어가 붙여지고 해석돼왔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부르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로,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로,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 실질적 내용적 민주주의로 구분되어왔던 것입니다.


사람의 자주성, 민중의 자주성, 대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


그렇다면 어떤 민주주의가 민중의 밥, 자유, 평등,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정치강령만이 아니라 조직의 운영 원리이자 그 구성원들의 생활철학을 포괄, 국가와 집단과 개인을 모두 변화 발전시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입니까? 필자는 ‘자주적 민주주의’로 세상을 바꾸는 이념을 정식화하고자 합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세상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사람의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입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입니다. 모든 집단의 주인으로서의 대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입니다. 달리 말해 돈이나 물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 지배자나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민중 중심, 간부나 활동가 중심이 아니라 대중 중심의 민주주의입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또한 민족(국가)의 자주화를 기반으로 세계의 자주화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입니다. 즉 나라와 민족(국가)의 자주성에 기초한 호혜평등의 국제관계를 추진해 전세계 피압박 민중들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입니다.       


정치이념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민족의 자주화, 민중의 자주화, 인간의 자주화, 세계의 자주화를 위한 정치이념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성격으로 볼 때, 민족의 자주화 없이는 민중의 자주화를 실현할 수 없고, 민중의 자주화 없이는 인간의 자주화도 전면 실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본의 세계화에 대응하는 국제연대의 비중이 높아진 게 사실이지만, 일국 단위의 민중과 인간의 자주화 없이는 한꺼번에 세계의 자주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적 민주주의는 우리가 두 발 딛고 있는 사회를 먼저 바꾸고 궁극적으로 세계의 자주화까지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자주화, 민중의 자주화, 전국적 자주화를 위한 민주주의


우리사회가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라는 사실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 외국군이 주둔해 있고 전시작전지휘권이 그들 손에 있으며, 우리경제가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그 하위파트너인 재벌들에게 저당잡혀 우리민중들이 초과 착취당하고 있고, 양키왜색, 황금만능, 약육강식의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 사상문화가 범람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청와대와 국회가 있어도 중요한 정치정책적 결정권을 주권재민(主權在民)에 따라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는 분단된 사회입니다. 외세에 의해 갈라진지 60년, 역사적인 6.15선언을 계기로 발전하는 남북관계도 길목마다 미국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사회입니다.


따라서 외세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고 소수 재벌을 포함한 지배층의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며, 외세에 의해 갈라진 나라와 민족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시켜 전국적 범위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민중들의 한결같은 소망입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열망을 반영한, 민족 자주를 위한 민주주의, 민중 자주를 위한 민주주의, 전국적 자주(조국통일)를 위한 민주주의를 집약한 정치이념입니다.


또한 자주적 민주주의는 이와같이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할 뿐 아니라, 자연과 낡은 사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연을 개발해 생산력을 높이고 보다 나은 생활수단을 얻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간이 짧은 안목으로 자연생태계를 너무 괴롭히고 훼손해 거꾸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자주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이 어리석은 개발주의, 성장제일주의를 허용치 않습니다. 또한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인 만큼, 봉건 잔재와 자본주의 시장질서, 특히 약육강식의 냉혹한 신자유주의가 배출한 우리사회의 모든 차별을 거부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다수자와 소수자 등의 온갖 차별을 반대하며, 나아가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의 차이까지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람은 자연을 위해, 자연은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성격과 임무에 맞는 과학적인 노선에 입각해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사회는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우리운동은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고 민중이 주인되는 통일된 세상을 만들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우리운동은 우선 민족의 자주, 민중의 민주주의, 연방제방식의 조국통일을 자신의 주된 임무로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정치이념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민족자주를 기반으로 민중민주와 연방통일을 실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민족자주 없이는 민중의 민주주의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울 수도, 자주적 민주개혁을 단행할 수도, 이북과 손잡고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위업을 달성할 수도, 그리하여 민중의 자주성을 활짝 꽃피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 유일패권을 자랑하는 제국주의 나라, 미국은 제3세계 식민지종속국에게 과거와 달리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 민중들이 지지하지 않는 독재정권을 지원해 반미로 돌아선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를 마치 민주주의의 모든 것인양 민중을 기만해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미국이 주문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와 결합된 자산가들의 민주주의이며, 특히 신자유주의 전면화 이후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야합한 극소수 재벌, 관료, 특권층의 민주주의일 뿐입니다. 신자유주의하의 민주주의는 ‘재벌독재’라 불러야 마땅합니다.


민족자주를 기반으로 민중민주와 연방통일을!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기만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인 것처럼 왜곡 선전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묶어두기 위해 요즘은 새로운 친미반북보수세력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뉴라이트’가 바로 그 들입니다. 과거의 친미냉전수구세력들이 반민족 반민주 반인권의 대명사, 부정부패의 상징으로 국민들의 지탄을 면치 못하고, 이른바 개혁세력, 구 민주화세력들이 국민을 실망시키고 6.15이후 가끔씩 왔다갔다 미국의 입장과 차이를 드러내자, 운동권 출신 변절자들을 중심으로 젊은 사람들을 규합해 제국주의 미국의 새로운 앞잡이들을 부식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뉴라이트’는 미국의 사주와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지금 기존 보수세력의 정치적 대표체인 한나라당의 물갈이를 외치고, 북인권이니 북한민주화니 뭐니 떠들면서 6.15통일시대를 역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론계, 교육계, 학계, 경제계 등 사회 각계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내 앞잡이들의 얼굴을 바꿔가면서까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악착같이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제국주의자들의 정치군사적 사회경제적 사상문화적 지배로부터 민족과 나라의 자주권을 쟁취하지 않고서 그로부터 고통받는 민중의 자주성과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주적 민주주의를 기치로 세상을 바꾸는 현단계 우리운동은 반제반독점민주주의변혁운동이라 성격 규정할 수 있습니다. 자주민주주의변혁단계, 즉 반제반독점민주주의변혁단계는 정치권력과 국가주권이 극소수 외세 앞잡이들을 제외한 노동자, 농민, 지식인, 중소상공인 등 광범한 민중들의 손에 있습니다. 또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결탁한 자본가들을 제외한 모든 중소상공인들의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자립적 민중경제를 저해하지 않는 외국인 투자도 보장됩니다. 이러한 자주민주주의변혁은 근로민중의 정치적 힘 관계와 해당 정세에 따라 좌우되겠습니다만, 사회적 소유와 개인 소유가 결합되고 계획경제와 소상품경제(농촌경제), 자본주의 상품경제가 결합된 혼합경제를 토대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주민주주의변혁은 노동자,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완전한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변혁과 다르며, 그 전단계의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합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세상을 바꾸는 우리운동은 우선 노동자가 주도하고 광범한 민중들이 참여하는 연대연합을 통해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합니다. 그 자주적 민주정부는 민중이 참여하는 자주적 민주개혁으로 자주적 민주정치를 실현하고 자립적 민중경제와 민족경제의 균형발전을 실현하고 고용안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시, 빈곤과 사회양극화 해소 등 민생을 안정시킵니다. 민족민주인간화교육을 진흥하고 민족민중문화를 창달하여 건전한 공동체 사회기풍을 조성합니다. 아울러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며 자주, 평화, 중립에 기초한 자주외교를 시행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정부,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범민족 연대연합과 정치협상으로 연방제방식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합니다.


자주민주주의변혁은 사회주의변혁과 다르다


민주노동당이 표방하고 있는 ‘자주와 평등’도 이상의 정치강령을 집약한, 자주적 민주주의변혁의 전략적 목표입니다. 자주를 기반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방침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민생문제와 민주개혁, 자주와 통일을 해당 정세와 민중의 요구에 맞게 올바로 결합시켜야 할 것입니다. 당원들의 자주성을 끊임없이 높이는 것을 전제로 민주적 토의와 통일적 당론 결정으로 당의 핵심 사업을 ‘선택과 집중’하고 서민들의 피부에 닿는 구체적이고 설득력있는 정책 대안을 내놓고 세련되게 싸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정규직, 조직노동자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중소영세상공인, 지식인 등 광범한 민중들의 동참을 위해 보다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꾸는 중심부대로서의 노동운동의 일대 혁신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합니다. 핵심노동자당원을 발동, 혁신의 주체를 세우고 ‘의식개혁’, ‘생활개혁’ ‘활동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3대 혁신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거대한 소수’, 원내외 입체전략은 소수정당의 한계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서 진보정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로 인해 필요한 것입니다. 대중정치투쟁을 기본으로 선거투쟁, 의정활동을 결합하는 원칙을 철저히 견지하고 당조직과 연대연합체, 의회공간의 제반 활동을 긴밀히 연결해야 합니다. 의정활동도 핵심 진보의제를 부각시키는 독자 활동을 기본으로 타 당과의 사안별 정책공조를 결합시키는 전략과 전술을 한단계 발전시켜야 합니다. 분파주의는 민족과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정파가 분파로 전락할 때를 경계하고 개인이나 정파보다 당을, 당보다 민중을 앞세우는 민중 중심, 당 중심의 조직사상을 철석같이 고수해야 합니다.  또 ‘대중에게서 대중에게로’라는 기치로 자세를 낮추고 대중속으로 들어가 먼저 대중에게 배우고 헌신 봉사하며 생활과 실천의 모범을 창출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치이념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길입니다.(<세상을 바꾸는 노선 정립을 위하여> 참조)

    

조직운영원리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또한 모든 조직이나 집단의 운영원리, 즉 조직사상입니다. 조직사상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사람의 자주성, 민중의 자주성, 대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집단이나 조직의 운영에 적용한 것입니다. 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 지배자나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민중 중심, 간부나 활동가 중심이 아니라 대중 중심의 민주주의입니다.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 원리는 세상을 바꾸는 조직적 무기인 진보정당과 노조, 농민회, 학생회, 여성회 등의 대중조직과 그 연대연합체만이 아니라 정당, 국가, 근로단체, 기업체 등 변혁이전이나 변혁 이후 우리사회를 끌고 가는 모든 조직의 보편적 운영원리입니다.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 원리가 오늘에 와서 특별히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민중의 자주적 요구가 유래없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 자주적 요구와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자주적 요구와 의사를 실현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이 대폭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주성 없는 민주집중제, 조직을 형식화 관료화시켜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 원리는 과거의 조직운영원리를 혁신한 새로운 조직운영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민주집중제를 조직운영의 일반원칙으로 삼아왔습니다. 민주집중제는 충분히 의견 수렴을 하고 다수결에 따르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바로 자주성입니다. 대중의 자주성을 끊임없이 높이고 이에 기초하지 않은 민주집중제는 조직을 형식화, 관료화시켜왔습니다. 동구권사회주의의 붕괴도 따지고 보면 바로 국가와 사회의 운영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민주주의 원리를 견결하게 고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7년 이후 우리사회 전반에 확산된 직선제 선거도 대중의 높은 자주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때 형식적 절차 또는 요식행위로 전락했습니다. 대의제도 대중의 자주성을 높이고 그들의 요구와 의사를 진정성있게 수렴하는 과정이 전제되었을 때만이 민주주의 제도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파견대표들만의 말잔치로 끝나는 예를 우리는 국회, 지방의회, 노조 대의원대회 등에서 무수히 볼 수 있습니다. 


자주적 민주주의 원리는 모든 조직의 생명인 자주성, 민주성, 통일성으로 발현됩니다. 자주성(自主性)은 글자 그대로 내 자신이 주인이다, 민주성(民主性)은 대중이 주인이다, 통일성(統一性)은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로 만든다 라는 조직의 성격입니다. 그런데 자주성과 민주성과 통일성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조직의 세가지 생명이 모두 중요하다 해서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자주성을 기반으로 민주성과 통일성이 밀접히 결합하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가지중 자주성이 기본 바탕을 이룹니다. 자주성이 없이는 제대로 된 민주성도 통일성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80년대말 어느 저명한 노동운동가는 자주성을 의존성에 대비함으로써 실천상의 편향을 초래한 적이 있습니다. 조합원들의 자립정신을 높이느라 강조된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를 노조의 자주성으로 해석하고, 단위노조간의 지원, 연대투쟁을 노조의 의존성으로 오해했습니다. 그 것도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공안정국속에서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탄압을 저지하고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기업별 노조의 지역별 업종산업별 연대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 그 지역별 업종산업별 연대투쟁의 결과로 생긴 자주적 민주노조의 결집체인 전노협-전노대-민주노총에의 참여 보다는 한국노총 민주화를 주장하며 그 곳으로 들어가도록 권유했습니다. 한 때 전민항쟁까지 설파했던 이 선배노동운동가는 92년 대선시 당선가능한 야당후보를 지원하고 동구권 붕괴 이후 사상적 동요 탓인지 노동운동을 포기했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 한국노동운동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나 우리나라 변혁운동사에서 검증된 사상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역동적인 노동자, 민중의 힘을 믿지 못해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 그 때나 지금이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인간의 자주성은 모든 구속과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속성입니다. 조합원의 자주성은 정권과 자본의 지배와 간섭, 간부들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노조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속성이며, 노조의 자주성은 정권과 자본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노동자들이 주인인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속성입니다. 민중의 자주성은 지배세력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나라의 주인으로 되고자 하는 속성입니다. 나라(민족)의 자주성도 외세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 민중(겨레)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자주성은 단순히 의존성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의 연관에는 상호의존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도 상호의존성이 있고, 상호의존성안에는 적대적 관계와 비적대적 관계가 있으며 비적대적 관계안에 우호적 관계가 있습니다. 기업별 체계하에서 노조와 노조간의 지원연대투쟁은 형제간이나 동지간이 그렇듯이 우호적 상호의존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성을 의존성에 대비함으로써 우호적 상호의존성마저 포기하거나 소홀히 대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자주성을 기반으로 민주성과 통일성을 결합하는 조직운영 원리

     

그 다음으로 자주적 민주주의는 ‘민주성과 통일성을 밀접히 결합하는’ 원리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조직의 민주성과 통일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 조직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자주성을 골고루 모아 하나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합원 한두사람의 자주성이 아니라 모든 조합원의 자주성을 빠짐없이 모아서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 노조의 민주성과 통일성이기 때문입니다. 조합원의 자주성을 끊임없이 높이고 이를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노조의 자주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주성은 민주성과 통일성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런데 민주성과 통일성은 조직의 성격과 규율에 따라, 또 같은 조직이라도 발전 수준과 해당 정세에 따라 때로는 민주성이, 때로는 통일성이 더 강조되곤 합니다. 노조는 민주성이, 당은 통일성이 더 강조됩니다. 노조는 대중조직이고 당은 정치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노조도 이제 갓 만들어진 노조냐, 제법 단련된 노조냐, 기업별 노조의 연합체인 연맹이냐, 단일노조인 산별노조냐에 따라 민주성과 통일성에 강조점이 다릅니다. 또한 정세의 긴박성에 따라 민주성 보다 통일성이 더 강조되기도 합니다. 평상시 민주적 토의에 충실하다가도 일단 유사시 위원장의 한마디 지침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 그 저명한 노동운동가는 자주성을 의존성의 반대개념으로 해석, 적용한데 이어 자주성, 민주성, 통일성의 관계를 자주를 기반으로 ‘민주를 중심으로 통일집중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정식화했습니다. 이 또한 적지 않은 실천적 편향을 낳았습니다. 당시 노동조합의 수준이나 연대투쟁과 연대조직의 중요성, 해당 정세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민주성 일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당시 노조간의 연대성, 통일성을 홀시했습니다. 긴박한 공안정국하에서 당장 백골단이 쳐들어오는데 각 단위노조의 민주적 토의과정이 부족하다면서 지원연대투쟁에 소극적으로 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주성을 토대로 한 민주성과 통일성은 결국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늘 조합원대중속으로 들어가 조합원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 조합원들의 자주적 요구와 단결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위원장이나 간부, 활동가들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 따라 조합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그 노조를 독재라 비난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모든 조직과 집단의 보편적 운영원리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자주성을 기반으로 민주성과 통일성을 밀접히 결합하는’ 원리로 조직의 생명인 자주성, 민주성, 통일성의 관계를 정식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주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조직의 성격과 발전 수준, 해당 정세와 구성원의 준비정도 등을 불문하고, 노조든 당이든 국가든 또 다른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의 주인인 대중의 자주성을 끊임없이 높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민주성도 통일성도 없고 그 조직의 자주화도 실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조직운영에서 자주성 없는 민주성은 형식주의, 대중추수주의로 전락하고, 민주성 없는 통일성은 독재, 독선과 관료주의로 흐르며, 통일성 없는 민주성은 자유주의로, 통일성 없는 자주성은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전락하고 맙니다.


자주성 없는 민주성은 형식주의, 대중추수주의로 전락해


대기업 노조의 운영을 예로 들어봅시다. 조합원들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정을 통해 고용불안에 움추리고 개인주의, 실리주의 성향이 강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간부, 활동가들이 자주적 변혁적 노동운동의 이념과 노선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활과 실천에서 모범을 세우면서 끈질긴 설득, 교양사업으로 조합원들의 자주성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현장토론에 기초한 총회 방식 등으로 조합원들의 자주적 요구를 민주적으로 수렴하고 통일시켜 사측과의 투쟁과 교섭을 벌이는 한편 조합원들과 함께 담벼락을 넘어 산업별, 사회개혁적 요구 쟁취를 위한 공동연대투쟁에도 적극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간부, 활동가들의 사상적 이론적 실천적 준비 부족으로 이런 기본사업이 소홀히 된 채 관성적인 노조 활동과 임단투, 노조권력을 둘러싼 계파 갈등과 조합원 지지 획득을 위한 무원칙한 대중추수주의에다가 비리사건까지 결합돼 조합원들의 불신이 깊어지는 등 노조 조직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입니다.

     

지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도 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 통일성을 위협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특히 자주성을 기반으로 민주성과 밀접히 연관돼 있는 통일성을 난폭하게 유린했습니다. 노동운동의 간부이자 활동가인 대의원들이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최종 다수결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며 사람들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고 회의를 파탄시켰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물론 사전에 대의원들의 높은 자각과 헌신으로  단위노조, 연맹 및 지역본부로 이어지는 조합원들의 의견 수렴이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회의석상에서도 얼마나 민주적으로 토론되었는지도 검토해야 합니다. 폭력사태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대의원들의 경각심과 적극적 태도가 부족했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이 신자유주의를 무기로 노동자를 총체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민중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분열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자주성에 기반한 민주성과 통일성을 밀접히 결합하는 노동조합의 운영원리를 철저히 견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동당, 당원의 자주성 높이지 않으면 의원, 당관료의 당이 될 것


진보정당이야말로 자주성을 기반으로 민주성과 통일성이 밀접히 결합되는 조직운영원리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조직입니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동당의 경우, 80% 이상의 당원이 당비만 내고 투표에 참여하는 수준의 당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당론 결정이나 당활동을 당원대중 중심이 아니라 간부, 활동가 중심으로 진행하는데 점차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현 수준의 진보적 대중정당에서 모든 당원들이 당 활동과 운영의 적극적 주체가 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민중에 기반한 당원들의 자주성을 높이는 완강하고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편의와 관성에 따라 간부, 활동가 중심으로 당을 끌고 간다면, 제1야당-집권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민중과 당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활동가들의 당, 심하게 말해 당 관료의 당, 허울뿐인 진보정당이 될 것입니다.


최고위-중앙위-당대회로 이어지는 당 의결집행기관의 운영도 당원들의 자주성을 높이는 것을 기본으로, 아직 사상적 실천의지적 통일성이 취약한 당의 현실을 감안해 당원들의 자주적 요구와 의사를 보다 민주적으로 수렴하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며 차이를 인정해 하나로 통일시키는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민주노동당 중앙위원들은 회의를 전후로 당원들의 의사를 얼마나 충분히 수렴하는지, 결정사항을 얼마나 충실히 해설, 집행하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지역위 운영위-시도당 운영위-중앙당 중앙위로 이어지는 일련의 의결과정을 당원들의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 현장토론에 기초한 총회 방식을 원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의 어지러운 인신공격적 주장과 표현들이나  정치사업을 앞세우지 않고 사소한 갈등도 당기위원회로 끌고가는 건전하지 못한 기풍은 일소되어야 마땅합니다.   

          

생활철학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모든 집단과 조직의 운영 원리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민중들의 생활철학입니다. 민중의 생활철학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도 ‘나로부터’라는 자주, ‘너와 함께’라는 민주, ‘우리 하나로’라는 통일을 통해 구현됩니다. 활동가들로부터 시작해 일반민중들에 이르기까지 ‘나로부터’,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라는 자주⦁민주⦁통일의 정신으로 생활속에서 모범을 보이고 생활속에서 단결을 도모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무슨 힘으로 세상을 바꿉니까? 이 잘못된 세상을 누가 대신 바꿔주지 않습니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 전농의 간부들이 민중을 대신해 세상을 바꿔줍니까? 오직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 전농의 간부들은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앞장설 뿐입니다. 그런데 민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민중의 생각에서 나옵니다. 민중의 생각이 바뀌면 민중의 행동이 바뀌고 민중의 행동이 바뀌면 민중의 생활이 바뀌고 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생각, 즉 사상의식이 사람들의 모든 활동을 조절,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중의 생활철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민중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까? 돈 중심,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사회, 그 중에서도 최악의 형태인 ‘외세 지배하의 신자유주의 사회’ 질서에서 개인주의, 보신주의, 이기주의, 실리주의, 자유주의, 허무주의, 패배주의, 출세주의, 공미숭미, 친미친일친중 사대주의, 반공분열주의, 한탕주의, 양키왜색, 황금만능, 퇴폐향락 등 지배세력이 양산한 온갖 잡사상이 우리민중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생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전근대적 인간관계가 배태한 지역주의, 연고주의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노동자, 민중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시장(市場)과 연(緣), 다시말해 신자유주의와 연고주의이지 결코 계급의식이나 진정한 민족의식이 아닙니다.


현장(직장)에서도 살벌한 신자유주의 경쟁원리에 지치거나 그에 대한 보완수단으로 노동자들이 쉽게 찾는 곳은 지난날의 인연입니다. 향우회, 동창회, 전우회 등이 기성을 부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기성정치권과 자본가들은 이를 악용해 다시 노동자들을 분할통치합니다. 우리민중들속에 민족적 애국적 열정이 용암처럼 꿈틀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IMF경제살리기에서, 6.15남북정상회담 지지에서, 월드컵 축구 응원에서, 탄핵 반대 열풍에서, 미순이 효순이 추모 촛불시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지배세력에 악용되고 민중의 고통과 불만을 잠재우는 허구적 민족주의, 애국주의로 둔갑합니다. 그런 점에서 황우석 사건은 허구적 애국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부족함이 없다 할 것입니다. 


‘나로부터’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정신으로 개인주의, 실리주의, 패배주의 극복해야


우리노동자의 경우, 제국주의독점자본-재벌대기업-영세중소기업-대기업노동자, 중소하청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로 이어지는 먹이사슬구조와 저들의 고용유연화, 임금차별화, 기업별 노조와 복수노조라는 분할통제전략으로 고용불안과 실질임금 하락, 후생복지 약화 등 전반적 생활조건이 악화되자, 미조직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조직노동자조차도 움추려들고 눈치를 보며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노동조합운동도 노동자의 생존권을 확실히 보장하거나 희망을 주지 못하고 간부, 활동가들은 평소 조합원을 위한 모범을 보이지 않다가 노조집행권을 둘러싸고 서로 삿대질을 해대며 싸우고 심지어 비리사건까지 터질 때, 또 1천5백만 노동자들의 희망인 민주노총도 정부, 국회를 상대로 투쟁, 투쟁을 외치고는 있으나 실제 노동자의 삶을 개선해주지 못할 때, 노동자들은 더욱 실망하고 좌절하고 앞날을 걱정합니다. 더 나아가 민중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 정치권은 이 당 저 당 할 것없이 개판 오분전이고,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민주노동당조차 소수정당으로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사람, 정책,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아직 대안정당으로서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 처자식 간수하며 하루하루 벅차게 살아가는, 아주 현실적일 수 밖에 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더 더욱 기가 죽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나 전민중적으로 뚜렷한 희망을 갖지 못한 채,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에서 하루종일 시달리다가 퇴근하고는 거저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술 한잔하며 인생의 푸념을 늘어놓고, 쉬는 날에는 집에서 주로 채널 많은 TV나 컴퓨터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폭력, 섹스, 노름의 저질 문화를 흠뻑 마시는 것이 일반노동자들의 생활이 되어버렸습니다. 주5일 근무의 사무전문직 노동자들도 등산, 낙시, 여행 등 다소 나은 여가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은 인사고과에 스트레스받고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조퇴, 명퇴 위협속에 주눅들어 개인주의, 이기주의 경향이 커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이른바 개미군단에 포함돼 주식에 매달리거나 심지어 일부는 노름판을 벌이고 경마장 마권에 연연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현실은 지배세력의 잘못된 정책과 문화로 인한 불안한 노동자의 삶에서 오는 요행주의, 한탕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시기 우리노동자, 민중들에게 지금 가장 무서운 사상의 적은 가슴속의 실망과 좌절과 한숨이며, 자기비하와 자포자기로 표현되는 패배주의, 허무주의입니다. 그리고 자기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실리주의입니다. 민중들의 지금의 이러한 생각들, 즉 사상적 경향을 어떻게 바꿔낼 수 있겠습니까?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빼어난 상임위활동이나 몇 번의 속시원한 폭로와 진보의제 부각으로 바뀌어집니까? 아니면 매년 되풀이되는 단위노조의 임단투나 민주노총의 전국적 총파업투쟁과 대규모 집회투쟁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노동자, 민중들속의 패배주의, 허무주의와 개인주의, 이기주의, 실리주의는 본질적으로 외세와 그 앞잡이들의 신자유주의 질서와 그 사상문화의 반영이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사상운동 수준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주체’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사상운동을 체계적이고 끈질기게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나약한 지식인들의 정신적 방황은 그렇다 치고, 꽤나 변혁에의 신념을 자부하는 활동가들조차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반공반북주의에 찌든 국민 정서를 탓하고 운동 내부의 관념적 논쟁을 경계한다는 구실로 변혁운동의 양적 질적 발전의 선행공정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운동을 무책임하게 방기한 것입니다.


올바른 대중의식화 가로막는 출세주의 버려야


외국의 사상이론적 실천적 경험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베껴대는 사람들은 차지하고서라도 21세기 민중의 요구에 맞는 우리식 운동을 하자는 사람들조차 교과서에 나오는 몇가지 원리와 노선을 주문처럼 외우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사람 중심, 민중 중심, 대중 중심의 사상을 대중속에서 풍부하게 응용해 발전시키고 다시 힘있게 확산하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간부직이나 공직 진출과정에서 오랜 운동 끝에 보상심리가 작용한 때문인지 개인의 조직적 대중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당원이나 조합원, 일반민중의 의식과 정서에 영합하고 사상적으로 쉽게 타협하면서 대중의식화에 적극적이고 목적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마저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활동가마다 지위와 역할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의 사상을 후퇴하거나 의식화사업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노선이 아니라 사상 말입니다. 머리나 말이 아니라 가슴과 실천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 우선 활동가들부터 사상운동을 앞세우는 운동풍토를 조성해야 합니다. 자신이 진정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적당히 먹고 살면서 좋은 일도 해보자는 사람인지, 그 것도 아니면 운동을 빌어 직장이나 지역, 나라의 어떤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인지 엄숙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사상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작업은 이론에 밝은 활동가들의 몫이지만, 사상운동은 모든 활동가들의 사명이자 임무입니다. 활동가들부터 ‘나로부터’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라는 자주 민주 통일의 정신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활동가들의 생각이 바뀌야 민중의 생각이 바뀝니다. 조합원들이 개인주의, 이기주의, 실리주의와 패배주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활동가들의 생각과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자, 민중속으로 확산시키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실리주의와 패배주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는 하나’ 라는 계급의식,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공동체의식,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변혁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나로부터’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라는 자주 민주 통일의 정신을 갖고 의식화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활철학으로서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활동가와 조합원, 민중들에게 ‘나로부터’ 시작해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단결해 살아갈 것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극복 비결-‘나로부터’ 일어나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단결하는 것


여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나로부터’라는 자주정신입니다. 누가 먼저 나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누가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냉혹한 신자유주의 질서는 우리민중들로 하여금 서로 눈치를 보면서 제각기 자기 살 궁리만 하도록 등 떠밀고 있으며, 우리활동가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 광풍과 맞서 싸워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활동가들이 생활이 어렵고 그간의 활동에 지치고, 여러가지 이유로 활동가들끼리 상처받았다고 해서 하나씩 주저 앉으면 도대체 누가 민중과 더불어 세상을 바꾼단 말입니까? 내가 퍼져 있는데, 어떤 활동가가 그 일을 대신 해준단 말입니까? ‘나로부터’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활동가인 나의 손에 민중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조합원들에게, 민중들에게 ‘나로부터’ 일어나자고,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실천적 모범을 보여 조합원들 자신, 민중 자신이 앞을 다퉈 ‘나로부터’라는 자주정신을 갖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주정신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활동가들부터 ‘너와 함께’ 해야 합니다. 먼저 활동가들끼리 계파, 정파, 조직, 의견그룹 따지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가야 합니다. 잘 잘못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러고 있기에는 적들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너무 극심하고 민중들의 처지가 너무 난감합니다. 지난날 운동과정에서 생긴 노선, 경험, 인연의 차이나 감정상의 앙금을 모두 덮어야 합니다. 이쪽 저쪽을 떠나 활동가들이 어려운 조건에서 아직 운동선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꾸는 우리의 소중한 동지들입니다. 장점을 먼저 보려고 노력합시다. 사상과 노선, 사업방법과 작풍에 이르기까지 다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노선은 옳은 것 같은데 작풍이 잘못돼 있거나 자세는 참 좋은데 노선이 잘못된 활동가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선, 하나의 잣대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습니까? 당장 모든 현장 제 조직들이 헤쳐 모여 하지 않는 상태에서 타 조직이나 의견그룹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타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벗읍시다’. 운동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노조 위원장이나 간부 자리, 당 최고위원, 국회의원, 단체장, 지방의원, 뭐 그 정도의 자잘한 꿈을 갖고 계십니까? 큰 꿈을 가집시다. 그것은 대통령이 되는 꿈이 아니라, 수천만 민중의 열망을 실현하는 꿈, 세상을 송두리채 뒤집어 엎는 정말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는 조합원들에게, 민중에게 ‘너와 함께’라는 민주정신을 고취시킵시다. ‘나로부터’ 일어나도 ‘너와 함께’ 하지 않으면, 도로묵입니다.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너와 함께’라는 민주정신이 취약하면, ‘나로부터’ 앞장서는 사람들이 지쳐 떨어집니다. 또한 ‘나로부터’가 ‘너와 함께’ 하지 않으면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조합원이나 민중을 대상화해 조직의 주인인 그들을 소극화시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하나로’라는 통일정신을 생활속에 철저히 구현해야 합니다. 통일은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너와 함께’ 하려 하더라도 당장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차이점을 앉은 자리에서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극복할 수도 있지만, 아무 때나 그렇게 했다가는 자칫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부각시켜 활동가, 조합원, 민중의 분열을 촉발하는 수도 있습니다. 차이만을 드러낸 채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서는 노동자, 민중들의 자주성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변혁운동사는 활동가와 민중들에게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로 만드는 ‘우리 하나로’라는 통일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해 ‘너와 함께’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쳐 자신의 요구와 주장을 분명히 하되, 최종 다수결의 원리에 따르고 함께 실천하고 평가하여 다시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조직적 기풍을 정착시켜야 합니다.


또 세상을 바꾸는 모든 사람들의 통일단결을 위해 차이점은 남겨두고 공통점을 중심으로 먼저 행동통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누구 말마따나 최대공약수로 실천하고 최소공배수로 단결해야 합니다. 특히 자주 민주 통일에 동의하는 모든 정파, 사회단체, 개인들이 모이는 민족민주연대연합운동이나 사상과 이념, 제도를 초월해 조국통일에 동의하는 모든 정부,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이 참여하는 범민족 연대연합운동에서는 ‘같은 것은 구하고 다른 것은 남겨놓고 후일을 기약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크고 넓은 ‘우리 하나로’ 통일정신이 요구됩니다.


4. 여타 진보적 이념과의 차이


사회주의와 자주적 민주주의


제국주의자와 그 앞잡이들은, 러시아와 동구 사회주의나라들이 자본주의로 넘어가고 중국, 베트남이 개방, 개혁과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실험하자, ‘사회주의의 파산’을 선고하고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떠들면서 가장 질 나쁜 신자유주의 수법을 전세계 인민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 나라들의 실패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핵심은 이념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입니다. ‘노동자,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이라는 이념과 제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과 활동이 문제였습니다. 당과 국가의 간부들이 사회주의 건설 초기의 혁명적 자세를 잃고 점차 관료주의에 물들어 노동자, 민중과 이반되고 그들의 자주성, 창의성을 높이지 못하면서 생산력 도 정체되고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상문화가 침습, 확산되어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된 것입니다. 동구 사회주의 경험은 민중이 제도적으로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이 되는 것만으로 민중의 자주성이 전면 실현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당과 국가의 간부, 활동가들이 앞장서 헌신과 모범을 보이고 민중의 자주의식, 공동체의식, 변혁의식을 끊임없이 높이며 생산력 제고를 위한 기술 향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양식을 창조하는데 게으름을 피우면, 제국주의의 농간과 내부의 이상흐름으로 그 사회가 망하거나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배부르고 마음 편하게 살고자 하는 인류의 이상적 가치입니다. 비록 동구 사회주의나라들이 무너지는 우여곡절은 있어도 사회주의를 통해 민중의 자주화, 사람의 자주화,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려는 인류의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각 나라 마다 다양한 특성이 있지만, 사회주의사회의 근본은 노동자,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갖고 있으며 정치생활, 경제생활, 문화생활에서 주인 대접을 받는 사회입니다. 그런 만큼 노동자계급의 당이 지도하고 노동자, 민중이 국가기관 전반에 주인으로 참여하며, 전민중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가 결합된 사회적 소유에 기초하여 계획적이고 균형있는 성장과 분배를 추구하고,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정신, 협동과 단결의 생활원칙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이 없어진 사회주의사회에도 차이는 남아 있고 경제적 곤란은 겪을 수 있습니다. 국가소유와 협동소유, 노동자와 농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등 각종 차이와 경제적 어려움은 사상과 기술과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제국주의의 봉쇄와 압박을 극복하면서 점차 해소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를 바꾸는 현단계 세상을 바꾸는 우리운동은 사회주의변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단계 한국사회변혁은 자주민주주의변혁, 즉 반제반독점민주주의변혁입니다. 사회주의변혁과 자주민주주의변혁은 그 당면 목표와 추진주체가 다릅니다. 자주적민주주의사회=반제반독점민주주의사회 건설의 실현 주체는 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에 의해 핍박받아온 광범한 민중세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제국주의독점자본은 자신들의 자본축적 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의 정치군사적 힘을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세계화공세를 통해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중소상공인을 비롯한 광범한 중간층을 착취하고 수탈하여 몰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주민주주의변혁은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도시서민, 지식인, 중소영세상공인 등 극소수 외세 앞잡이들을 제외한 광범한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이 되고 사회적 소유와 사적 소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결합되어 있으며,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상문화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 반면, 사회주의변혁은 노동자(농업노동자까지 포함)가 국가주권과 생산수단,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의 주인이 되고 임노동과 사적 소유를 철폐하며 집단주의 문화를 지배적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우리운동의 당면 임무는 남쪽의 자주민주주의사회=반제반독점민주주의사회 건설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근로민중의 준비정도와 사회정치적 힘의 관계가 변화, 발전함에 따라 민중의 주력부대인 노동자, 농민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주인으로 되는 사회주의변혁을 지향하게 됩니다. 단지 국민의 뿌리깊은 반공정서 때문만이 아니라,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에서 민족자주, 민주민주, 조국통일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자주민주주의 변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현 단계에서, 충분한 준비도 없이 자본가 일반, 가진자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사회주의변혁은 명백히 우리 현실에 맞지 않고 진보운동을 고립시키는 좌경적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민족이라는 집에 불이 나서 타고 있는데, 불 끌 생각은 하지 않고 석가래 먼저 바꾸려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와 자주적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도 말로는 노동자,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정당의 정치적 지도를 일당 독재라 비난하면서 다당제하의 선거와 의회를 통해 집권하고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수정하여 생산수단을 사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를 극복하자면서 주장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도 본질은 사회민주주의이며, 그 좌파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민주주의에 어떤 화려한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현실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진하지 못했거나 실패했으며, 사회주의 사회로의 평화적 이행은 커녕,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항상적 위기, 특히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일부 진전된 복지국가제도와 사회적 약자 보호마저도 후퇴되고 만성적 빈부 격차와 실업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경우, 한 때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자본주의적 국유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민주의의 모범으로 알려진 스웨덴도 기업의 이윤을 기초로 ‘임노동자기금’을 조성, 주식을 구입해 노동자의 기업 소유를 확대하고자 했으나 내부의 반발로 누더기 법안이 되고 7년후 보수정권 등장으로 그 기금제도 자체가 해체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사민주의에서 말하는 다당제하의 선거, 의회 방식을 통한 민중의 정치적 자주성 실현도 완전히 허구적임이 드러났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사회경제권력이 자본가들에게 있고 이들이 보수정당을 통해 견제할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정당안에도 들어와 강력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요구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매번 선거때마다 표를 더 얻고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애초의 복지공약 등 평등관련정책이 계속 양보했습니다. 독일사민당이나 영국노동당의 이른바 ‘제3의 길’이니 ‘신중도’니 하는 것이 그에 해당합니다. 그 놈의 제3의 길은 급기야 미국의 부시와 손잡고 코소보를 폭격하고 무고한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파병을 추진해 전범국가라는 오명까지 덮어쓰게 만들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의 또 한가지의 한계는 자본주의사상인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사회주의사상인 집단주의로 바꾸고자 하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생산수단의 공유만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실현하겠다는 경제주의적 관점에 기초해 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사회민주주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자유주의 물결속에서 사민주의조차 우경화하고 있는 서구 사회는 그나마 제3세계로부터 초과이윤을 흡수해 자국의 노동자, 민중에게 나눠줄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있었으며, 부르좌민주주의혁명을 거쳐 사상의 자유, 노동3권 등 일반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또 그런 서구 각 나라들조차 20세기 초반의 노동자, 민중의 혁명적 공세로 자본주의 자체가 위협받자 어쩔 수 없이 사민주의 정책과 제도로 양보했고, 제2차대전 이후 세계적 범위에서 사회주의권이 성장하자 자국의 노동자, 민중을 달래느라고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약간의 사민주의 정책을 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본, EU 등 제국주의연합세력이 정치군사적 경제적 사상문화적으로 세계 유일 패권을 구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겁이 나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자, 민중들과 타협해 복지니 노동권 보호니, 일부라도 사회적 소유를 허용하겠습니까? 역사가 가르쳐주는 변함 없는 진실은 지배세력은 절대로 스스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국사회를 봅시다. 한국사회는 외세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입니다. 외형적으로 경제규모가 세계 12위이고 1인당 GNP가 1만4천달러이지만, 자본과 기술과 원료와 시장, 모든 면에서 제국주의 독점자본에 수직계열화된 하청경제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노동자, 민중에 대한 초과 착취가 이뤄지고 중산층이 끊임없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 그늘 아래의 상품수출시장에서 약간의 이윤을 거둬 오고 일부 자본이 동남아, 중국으로 진출해 노임을 착취해 오지만, 그 이상의 수입으로 국내 자본축적기반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외세, 분단, 독재의 정치와 문화로 인해 부르좌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에서조차 보장하는 초보적인 기본권과 민주주의도 충분히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대중정부 이후 노사정위원회를 가동했으나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합의가 어렵고 합의해도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타협과 선거, 의회를 통한 복지 증진과 사회적 약자 보호, 나아가 생산수단의 공유를 실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이며 대중에 대한 기만입니다.             


물론 사민주의와 자주민주주의는 현상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참여하는 정부를 수립하고 사회적 소유와 개인 소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결합한 혼합경제의 형태를 띤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민주의와 자주민주주의는 본질에 있어 확연히 구분되는 이념입니다. 사민주의는 선거, 의회활동을 통해 정치세력화, 집권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자주민주주의는 대중정치투쟁을 기본으로 선거, 의정활동을 보조축으로 결합해 집권하고자 합니다. 사민주의는 개인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경제체제를 점진적으로 개혁하여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려 하지만, 자주민주주의는 그것은 불가능하며 사회적 소유를 위주로 개인소유를 결합하고 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경제를 결합한 혼합경제를 토대로 합니다. 사민주의는 돈 중심, 물질 중심과 엘리트 중심의 사상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자주민주주의는 사람 중심, 민중 중심의 공동체적 사상문화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사민주의는 사회주의변혁을 가로막고 이를 대체하는 이념이지만, 자주민주주의는 사회주의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단계의 이념입니다. 특히 사민주의자들 중에는 통일의 파트너인 이북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너무 강해 본의 아니게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의 반북공세에 악용되고 6.15시대 정부, 정당, 사회단체들의 연대연합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주의는 민중민주주의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유사한  이념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진보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주민주주의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보민주주의가 개념상 몇가지 제한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개념상의 한계는 세가지입니다.


첫째,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치이념에 국한되어 있는 민주주의개념입니다. 무릇 하나의 완성된 이념이란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집약한 정치이념일 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모든 조직(변혁 이전의 정당, 사회단체만이 아니라, 변혁 이후의 당과 국가, 외곽단체 등)의 운영에 관통되는 조직사상이며, 그 조직이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생활철학을 모두 망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조직사상이나 사람의 생활철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제일의 생명인 자주성을 드러내 강조하지 못하고 ‘보수적’이란 말의 반대 개념으로서 ‘진보적’으로 추상화시켜 어떤 민주주의인지 불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자주적 민주주의는 사람의 자주성, 민중의 자주성, 대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정치강령의 집약적 표현이며 모든 집단과 조직의 운영 원리이자 민중의 생활철학으로서 새로운 민주주의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치강령조차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이념으로서도 부분적인 민주주의개념입니다. 한국사회변혁운동의 당면 임무인 민족의 자주, 민중의 민주주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민중의 진보적 민주주의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족자주와 진보적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병기하고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민주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한 것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변혁운동의 3대 과제, 즉 민족의 자주, 민중의 민주주의, 조국통일은 상호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갖습니다. 따라서 3대 정치강령을 모두 포섭하고 여기에 일관되게 작용하는 새로운 민주주의개념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사람의 자주성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성, 민중의 자주성, 전국적 자주성(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입니다. 민족의 자주화를 기반으로 민중의 자주화와 전국적 범위의 자주화(통일국가의 자주성 실현), 나아가 세계의 자주화를 위한 정치이념입니다.


셋째, 진보적 민주주의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변혁단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개념입니다. 45년 해방 직후 우리나라사회가 식민지반봉건사회일 때, 당시 사회변혁이 사회주의변혁단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침략자인 미국의 부르좌민주주의변혁단계도 아니라는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란 개념으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변혁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우리사회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로 점차 전환된 이후, 80년대 운동권에서 즐겨 사용하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변혁이념을 보다 대중화하여 90년대말부터 일부에서 다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민중(인민)민주주의란 용어도 식민지반봉건사회-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변혁이념으로서 90년대까지 사용되어 왔습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 보다 한 단계 발전된 새로운 민주주의개념입니다. 자주적 민주주의는 현단계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성격, 즉 반제반독점민주주의변혁의 요구에 맞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유래없이 고양된 사람의 자주성, 민중의 자주성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마치며


또 다시 인간의 근본문제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라고. 흔히 우리는 인간이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기만 잘 살려고 하고 남을 짓밟으려 하며, 경쟁 없이는 일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계급사회를 살아오면서 민중을 무시, 분열, 통치해온 지배세력의 이같은 가치관이 자기도 모르게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그래서 노동력을 갖고 있는 인간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되는 돈 중심,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사회, 특히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정글의 법칙만이 통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애초 이기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적 관계인가에 따라 사람은 이기적일 수도 있고, 이타적일 수도 있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돈 있고 빽 있는 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몸뚱아리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 살고, 그 것마저 자본가들이 사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는, 여기에다가 외세의 지배와 간섭, 침략과 수탈, 그리고 조국분단으로 인한 피해까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는 민족적 계급적 차별이 난무하는 지금의 사회적 관계가 우리 민중들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바꾸면 사람은 더 이상 이기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의 어릴 적 시골풍경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시장질서가 농촌 구석 구석까지 점령하지 않았을 때 그 곳에는 인정이 넘치고 서로 도우며 살려는 생각과 생활양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시골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않았으나 지금처럼 이렇게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바꾸면, 외세 지배하의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존의 필수항목처럼 되어 있는 이기적 사고, 이기적 행동은 오히려 사회악이 될 것입니다. 왜? 세상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세상만물과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고, 주인으로서 세상만물과 자기운명을 바꾸려 하며, 세상만물과 자기자신을 인식하고 바꾸기 위한 모든 활동을 조절, 통제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 자주성을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자주성은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의 자주성은 그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자주성 없이는 제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계급사회, 특히 사람을 상품화해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할 수 없고, 세상만물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자주성을 꽃피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자본주의사회’, 그 극단적 표현인 ‘외세 지배하의 분단된 신자유주의사회’에서 어떻게 민중의 자주성, 사람의 자주성이 실현되겠습니까? 그래서 민족의 자주성, 민중의 자주성, 사람의 자주성, 나아가 세계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 자주적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자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인 자주성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민족의 자주, 민중의 민주주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고, 자주성을 기반으로 민주성과 통일성을 밀접히 결합하는 원리에 따라 진보정당, 연대연합체, 각계 대중조직을 비롯한 모든 조직과 집단을 운영하며, 그 속의 활동가들로부터 일반민중들에 이르기까지 ‘나로부터’ ‘너와 함께’ ‘우리 하나로’ 라는 자주 민주 통일의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과 생활과 활동을 바꿔야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투쟁할 때나 한잔 할 때나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고 목이 터지게 외쳐왔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에게 분명한 목표, 그 목표에 이르는 길, 그 길을 따라 진군하는 조직의 운영원리와 사람들의 바람직한 생각과 생활과 활동의 상을 선명하게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노총이 세상을 바꾸는 정치총파업투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투쟁! 그것은 몇가지 법, 제도를 바꾸는 투쟁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진보세력의 대연합, 연대연합체 건설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연대연합체 건설! 그 것은 정치적 구심이 확고하고 중심부대로서의 노,농이 튼튼하며 중간층을 광범하게 견인해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올해부터 집권과 변혁과 통일의 청사진을 민중앞에 내놔야 합니다. 제1야당, 나아가 집권! 그 것은 지금의 정치사상적 통일성, 조직적 대중적 기반, 사업방식과 작풍, 기풍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사람도 정책도 조직도 더 잘 준비해야 가능하다는 것도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이념을 정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이념 없는 실천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가야 할 목표를 잃고 열심히 노를 젖는 것과 같습니다. 노선 없는 실천도 나침반 없이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지역과 직장의 현장활동가들이 앞장서 대중실천속에서 검증된 그간의 변혁 사상과 노선과 방법을 다듬고 보완하고 체계화하여 민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뚜렷한 이념적 좌표를 마련하길 기대합니다. 서론에 지나지 않는 필자의 이 중구난방도 대중속에서 헌신하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의 가슴에 닿는 생생한  경험을 통해 비판, 수정되고 구체화되기를 바랍니다.(2006년 2월 1일 작성, 이론과 실천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