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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이 뭐길래

조선일보, 또 낯 뜨거운 ‘민족지’ 분칠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10. 3. 6.

조선일보, 또 낯 뜨거운 ‘민족지’ 분칠


5일 조선일보가 창간 90주년을 맞아 ‘자화자찬’으로 지면을 꾸몄다.

 

조선일보는 5일 104면을 발행해 △한국 이미지 국제 조사 △창간 90주년 토론회 △오라일리 세계신문협회장 인터뷰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100년 장수 기업의 비결 기획 등을 실었다.

 

이 과정에서 또 다시 일제강점기 방응모와 자사의 친일행각은 은폐한 채 조선일보를 ‘민족신문’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13면 <‘조선일보 창간호’ 3․4․13․14면 발견/ 한국 언론사 공백 메울 귀한 자료…90년 만에 ‘세상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자사를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 이 땅의 모든 민족신문은 사라졌으며, 그 ‘언론 암흑’ 10년 만에 가장 먼저 나온 신문이 조선일보였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일보는 창간호에서부터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넘쳤고 그렇게 출발한 조선일보에 대해 온 민족이 보낸 뜨거운 성원이 창간호 지면에 넘친다”고 낯 뜨거운 주장을 폈다.

 

 

▲조선일보 사설

사설 <창간 90년에 북녘 형제자매의 고난을 생각한다>에서는 3․1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조선일보가 창간될 수 있었다며 “민중의 고마움을 돌이켜보면 조선일보가 1920년 3월 5일 창간 이후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에 몰리던 날까지 핍박받는 조선 백성의 소리를 대변하면서 일제에 의해 8만8000여건의 기사를 압수당하고 500건 이상의 기사를 삭제당하고 4차례에 걸쳐 장기간 발행정지 당한 것은 조선일보의 당연한 보은(報恩)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포장했다.

 

또 “조선경제의 취약(脆弱)함으로 주저앉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상재(李商在) 신석우(申錫雨) 안재홍(安在鴻) 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진영의 독립운동가들이 혹은 일신(一身)의 안위(安危)를 던져넣고 혹은 전 재산을 기울여 선뜻 조선일보 경영의 무거운 짐을 지겠다고 나섰던 것도 조선 민중과 우리말 민족 신문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초창기 친일 자본가 단체 <대정실업친목회>의 주도 하에 예종석, 조진태 등 친일 행위로 치부한 반민족 행위자들이 차례로 사장에 올라 신문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21년 4월 8일, 송병준이 경영권 일체를 인수하면서 더욱 심한 친일신문이 되었다.

 

조선일보가 ‘민족신문’이었던 시기도 있었으나 지금의 ‘방씨 일가의 조선일보’와는 관계가 없다. 1924년 9월 13일 신석우가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 한때 이상재, 안재홍, 조만식 등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조선일보의 경영이나 편집을 맡으면서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를 내걸며 민족정신과 신념을 고취하려했다.

 

 

 

▲조선일보 1936년 1월 1일

<“우리는 대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신년사 중)

 

 

▲조선일보 1939년 7월 8일 기사

<조선일보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된 조선 젊은이가 전사하자 “영예의 전사”로 대서특필하며 조선 사람들을 향해 일본에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물러난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일보는 일본 제국주의와 그 시책에 협력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지금까지 조선일보를 소유하고 있는 방씨 일가의 방응모가 1933년 3월에 경영권을 인수하면서부터 그 친일의 정도가 극심해졌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상재, 안재홍 선생 등이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한 사실을 두고 “조선 민중과 우리말 민족 신문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방응모의 친일 행각을 덮고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포장하는 데 써먹고 있는 것이다.

 

(폄) 민언련... http://blog.daum.net/ccdm1984/17044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