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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통역사의 길

신 건물에서 첫 <수화특강>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15. 5. 30.

난 목요일(28일) 휴가를 냈다.  


평일에 수화통역 의뢰를 받으면 부담스럽지만 흔쾌히 수락한 날이다.
오전부터 농인를 만나 상담을 하고... 하루종일 수다(?)를 떨며 함께 보냈다.

저녁엔 경기도농아인협회 수원지부에서 기초반 교육과정 <수화 특강>을 했다.
지난 4월10일 개관한 신건물에서... 에어컨 틀고... 처음으로~~

 

 

 

기초반 특강

 

>> 손으로 말해요, 수화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입을 엽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죠. 그윽한 눈빛이나 은은한 미소, 찡그린 미간과 굳게 다문 입술, 축 처진 어깨나 느린 발걸음 등은 들리지 않아도 보이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온몸은 저마다의 ''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언어가 있습니다 

손으로 표현하는 시각언어 '수화'입니다. 수화는 농인과 청인이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입니다. 입으로 하는 음성언어보다 수화는 온몸으로 표현되는 몸짓이나 얼굴표정의 비중이 더 크겠죠?

 

 

>> 수화의 이해

 

> 정의 : 시각-몸짓 기반 언어

 

수화(手話, 손말)는 손짓이나 제스처를 사용해 의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농인의 정서와 문화를 깊이 반영한 독특한 언어입니다. 청인이 흔히 쓰는 구화(口話, 입말)와 가장 큰 차이점은 청각-음성이 아닌 시각-몸짓 양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수화가 언어로 인정받게 된 것은 50여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원시적 의사소통 방식으로 홀대 받던 수화는 1960년대 나름의 문법과 어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지위가 상승됐고, 언어로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수화가 언어의 한 갈래가 되자 언어의 요건은 '음성에 의한 의미 전달'이 아닌 '신호에 의한 의미 전달'로 바뀌었습니다.

 

> 언어적 특징 : 가시성, 구체성, 감각성

 

첫 번째는 가시성입니다. 

수화는 눈으로 보는 언어로 쉽고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입말이라면 목소리가 작거나 발음이 부정확해 인지하기 힘든 부분을 수화는 시각에 의존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구체성과 감각성입니다. 

수화는 음성언어가 갖지 못하는 구체적인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얼굴표정과 손, , 상반신을 동원해 다양한 기호를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줘 생생한 감정표현을 돕습니다.

 

세 번째로 수화는 음성언어의 문법을 완전히 따르지 않습니다. 

수화는 한국어와 달리 품사의 구분이 없고, 어순이 도치되기도 합니다. 또 조사의 사용을 대부분 생략하기도 합니다.

 

> 구성요소 : 수형, 수위, 수향, 수동 그리고 비수지신호

 

수화의 구성요소는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크게 손의 모양과 위치, 방향, 움직임 등입니다.

 

먼저, 수형(手形, 손의 모양)은 어떤 모양이나 상징을 형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수위(手位, 손의 위치)는 얼굴의 특정 부위를 가리키거나 얼굴 아래에 머무는 등 상황과 표현에 따라 각각 달라집니다. 수향(手向, 손의 방향)은 손바닥의 방향과 펼쳐진 손가락 끝의 방향에 의해서 결정 되고요. 수동(手動, 손의 움직임)은 수화를 하는 손의 동작입니다.

 

이밖에 비수지신호도 있습니다. 

수화는 손동작 이외에 얼굴표정이나 고개와 머리의 움직임, 어깨와 몸의 움직임으로 눈으로 보는 말을 완성합니다.

 

> 주의사항 : 눈을 보고 말해요

 

수화는 시각언어로 대화하는 상대방과 반드시 눈을 맞춰야 합니다. 

손을 보는 건 물론 얼굴표정도 함께 읽어야 하는데요, 이는 수화가 어휘에 맞는 표정과 몸가짐으로 문법 기능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또 수화는 큰 동작, 작은 동작, 약한 동작을 사용하는 만큼 공간 활용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화는 한 어휘가 상황에 따라 동작, 모양, 의미까지 다르게 사용되는 만큼 해석에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또 수화 고유의 관용표현이 많으므로 단순한 낱말 뜻으로 대화를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 시각 기반의 농 사회·문화

 

> 잘 보는 사람, 농인

 

농인과 청인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관점은 '청각장애'의 유무였습니다. 

농인(Deaf people)을 청각장애인(Hearing impaired person)으로 여기는 인식은 수화가 언어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달라집니다. 1960년대 들어 농 자체를 문화적, 인류학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겼고, 언어학자들은 농인과 청인의 차이는 청각기준이 아닌 문화적 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 드라마는 농인에 대해 '못 듣는 게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병리적 관점에서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 63, 농인의 날

 

우리나라에는 약 35만 명의 농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매년 63일은 농인의 날로, 조선농아인협회(1946)가 설립된 6월과 귀의 모양을 형상화해 닮은 숫자 '3'을 조합해 제정됐습니다. 이 날은 농인의 화합과 복지 향상을 위한 각종 행사와 대회가 열리고, 모범이 되는 농인과 수화통역사들이 수상을 받습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살고 있던 농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동안의 안부를 소리 없는 말로 풀어내는 만남의 장이 마련되기도 합니다.

 

> 농 사회·문화의 특징

 

농인은 그들만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지닌 집단입니다. 

예를 들어 청인은 상대방을 부를 때 소리 내 이름을 부릅니다. 반면 농인은 손을 흔들거나 어깨를 두드려 사람을 부릅니다. 친한 사이에는 발짓으로 부르기도 하고, 양손에 물건이 있어 손을 쓸 수 없을 때는 발로 바닥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농인들은 눈으로 듣고, 느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들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 코다(CODA, Chindren of Deaf Adults) : 이중 언어 사용자

 

청인부모에게 태어난 농인이 보편적이지만 농인부모로부터 태어난 청인 자녀도 있습니다. 

이들은 '코다'라고 부르는데, 수화와 한국어 두 가지 말을 모두 쓰는 이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코다는 가정에서 부모와 수화로 대화하고, 사회에서 청인과 구화를 쓰며 자랍니다. 이들은 언어를 특정한 사람이나 상황에 대입해 사용하는 훈련을 거듭하며 성장하기 때문에 이런 장점을 살려 농 사회에서 유능한 수화통역사나 수화연구자로 활약하기도 합니다.

 

> 편의 기기들

 

보는 문화가 몸에 밴 농인들 문자메시지, 진동식 시계 등의 기기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농인들이 자유로운 인터넷 검색이나 채팅을 할 수 있어 널리 애용되고 있습니다. 또 농인의 문자메시지 사용은 문장구사 능력을 향상시키는 부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한편, TV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여가활동으로 자리 잡았지만 농인이 TV를 보려면 자막방송과 수화방송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992MBC 자막방송 개통을 시작으로, KBS, SBS까지 확대됐습니다. 또한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말 개국한 종합편성채널도 수화통역, 화면해설방송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TV가 농인의 정보접근권을 보장하고는 있지만 아직 생방송이나, 뉴스속보,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는 적용비율이 낮은 실정입니다.

 

 

>> 쉽고 재미있는 수화

 

> 첫 만남과 자기소개

 

농인은 상대방이 농인인지 청인인지에 따라 의사소통 방식(수화, 구화, 필담)을 달리 하기 때문에 처음 만나 소개할 때 농인인지 청인인지 먼저 묻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다음 통성명을 하는데 농인들은 대개 한글이름과 농 사회에서 사용하는 수화이름이 있습니다. 수화이름은 신체 외모의 특징을 살려 정해지는 게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눈썹 짙은 남자, 보조개 깊은 여자, 아랫입술이 두꺼운 남자, 코가 오똑한 여자 등입니다. 수화로 농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 수화이름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소리를 넘은 소통, 수화통역

 

> 수화통역의 개념

 

통역은 단순한 단어치환이 아니라 출발어(source language)가 담고 있는 내용과 의미, 그에 숨겨진 뉘앙스와 정서까지 자연스럽게 도착어(target language)로 전달하는 고도의 지적작업입니다. 수화통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인과 청인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기 위해 수화를 구화로 또는 구화를 수화로 바꿉니다. 여기서 수화통역사는 농인의 입과 청인의 눈 역할을 하는 의사소통의 연결고리입니다.

 

> 수화통역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수화가 농인의 의사사통 수단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00여 년 전입니다. 

1909년 미국인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 평양에 맹아학교를 세우고 농교육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정식 수화교육도 이뤄졌습니다. 당시에는 필요할 경우 농인이나 가족들이 수화통역을 맡았습니다. 이후 수화가 언어체계를 갖추는 동안 수화통역도 같이 발전했습니다. 1960년 수화를 언어의 일종으로 보는 움직임과 1981년 세계장애인의 날 선포를 계기로 수화에 대한 관련 연구도 늘어났습니다.

 

장애인복지가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는 상황에서 농인의 의사소통과 정보접근권 문제가 부각됐고,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화통역의 필요성도 커졌습니다. 

이에 따라 1996년 수화통역사 시험 제도가 도입됐고, 다음해에는 503명의 수화통역사가 배출됐습니다. 초기 자격인정으로 출발한 수화통역사 시험은 2006년 국가공인을 획득해, 올해 11회 시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 수화통역사의 요건

 

수화통역은 실시간으로 고농축 정보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한국어 실력과 수화에 대한 이해력, 표현력이 뛰어나야 하다는 건 기본인데요, 이 밖에도 수화통역사에게는 몇 가지 필요한 요건들이 있습니다.

 

수화는 시각신호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눈에 피로감을 주는 복장을 멀리해야 합니다. 

또 매니큐어나 화려한 장신구를 삼가 손을 늘 청결하고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개인정보에 대해 비밀을 지키는 엄격한 직업윤리 의식도 요구됩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수화통역사의 윤리강령을 제정해 적절한 지침을 발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