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욕을 해댄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보니 입사한 지 3년도 안된,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고등학교도 다니지 않을 적 발생했던 1998년 현대자동차 투쟁을 두고 나를 비난하며, "맛이 갔다", "개량주의자다", "회사 편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옮기고 다녔다.
"당신이 나를 알아?" 만나자마자 "당신이 나를 알아?"하니 우물쭈물하다 "잘 모르는데요"라고 답변 하길래, "나도 당신을 잘 몰라. 그런데 왜 아는 척 하고 다녀"라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요즘에는 운동에 입문하여 처음 배우는 게 인물평이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맛이 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며 사람에 대한 오해를 키우는 것이다.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을 깨우치기보다는 왜곡과 편견을 먼저 가르치고 배우는 모양이다. 이걸 우리는 현장에서 '색안경부터 씌운다'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눈을 뜨도록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의식을 주입한다. 리모콘만 누르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기계 같은 행동대원만 양산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착각 속에서 일으킨 행동의 결과는 대단히 위험스럽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다. 진실과 정의도 구분할 필요 없이 무조건 줄을 서야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데 협조하지 않으면 경계하고 제거해야 할 적이 되어버리니 이건 운동판이 아니고 전쟁터로 변질되었다.
그들이 가르친 이분법적 사고와 흑백논리는 모두 적과 아를 편가르고, 독선적이며 강제력이 숨어 있기에, 그들 중 누가 권력을 차지한다해도 이는 독점이며 독재가 된다. 그리고 투쟁을 만들어 낼 실력도 없어 무능력한 밑천만 드러날 뿐 아니라,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누가 그들을 영혼이 빼앗긴 인간병기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상대를 전부 제거하면 그 칼끝은 곧 가르친 자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 올 것이다.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다 하루는 '특근거부' 문제로 현장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회사측의 노동탄압에 강력한 투쟁으로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어느 현장조직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고, 조합원들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조합원 대중의 여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투쟁방침이 아니라 강경한 목소리가 현장을 지배해 가는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결국 현장의 대의원들이 모여 논의를 했지만 특근거부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예정대로 근무를 했는다. 그런데 월요일 출근을 해보니 대자보를 부착한 현장조직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했다. 그만큼 강력한 특근거부 목소리를 냈다면 당연히 그들 현장조직 소속은 출근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지적이었다.
조합원 대중은 활동가들의 일관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도 현장에서 하는 주장과 행동이 다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는 대자보를 작성하여 지침을 내리는 사람과 현장노동자들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거라고들 했다. 즉 현장조직의 운동도 구상은 학출(대학생 출신)이 하고, 실행은 현장노동자가 하는 분업화 현상이 대중투쟁의 역동성을 거슬러 오르는 모습으로 나타난 사례인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특근거부 사례는 현장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이지만, 더 넓게 보면 연맹의 정파도 이와 비슷하고 민주노총의 정파간 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 등 진보운동 진영 또한 명확하게 자기 책임을 지기보다는 발을 빼고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 명수다. 무슨 사안이 생기면 핏대 올리며 논쟁을 하지만 여전히 결과는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기에 대중들은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다.
옳고 그름보다 정파의 이해득실이 우선 민주노동당 정책실에 근무하다 사직한 어느 당직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이것이 어느 정파에 유리하냐"는 주판알이 튕겨지고, "부유세와 조세개혁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과 기본 원칙조차 없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정파간 갈등에 몰두하며 구체적 대응 능력을 상실한 당의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당시 민주노동당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사람 하나 경질하는데 민주노동당의 운명이 걸린 것처럼 피를 토하는 논리를 펼쳐졌지만, 결국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편협함과 대중 설득력을 잃은 주장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대립하는 양편 모두 중심과 균형을 놓치고 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 참여여부를 놓고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라는 내홍을 겪고, 4월 임시국회에 상정된 비정규직 확대 개악안 저지를 위한 총파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현 집행부의 반대편에 섰던, '대화보다 투쟁'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서 "총파업이 제대로 성공하면 이수호만 키워주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의 정책도, 민주노총의 총파업 성사여부도 정파의 이해득실이 최우선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는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우리 스스로 내부를 돌아보아도 제정신이 아니다. 이 사회의 진보와 변혁을 위해 함께 운동하는 '동지'는 간 데 없고 살벌하고 황량한 '적과 아'만 존재한다.
운동권 내부에 즐겁고 행복하며 아름다운 미래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설 땅은 자꾸 좁아진다. 그리고 그 위에 상대만 보면 깃털을 세우고 쪼아대려고 달려드는, '싸움닭'이 칭송을 받는 무인시대 활극이 펼쳐지고 있다.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반전평화'이고, '평등과 연대'라고 하지만 정파간에는 전쟁을 선포하고 '상대를 죽여야 산다'는 약육강식이 우선하는 판이다. 현재의 정파들에게는 평화와 연대정신을 말할 자격이 없다. 연대하여 힘을 모으기보다는 트집을 잡고 흠집을 내어 분리하고 분열하는 데서 진보운동의 위기가 온 것이다.
대중과 괴리된 소영웅주의자들의 객기 우리 진보운동진영은 대중에 대한 믿음을 너무 빨리 거두거나 가볍게 여겼다. 그들의 조급증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못하는 이론이나 이념을 들고 와서 대중들에게 어거지로 먹이다가 고개를 돌리거나 먹기를 거부하면, 대중을 탓하고 원망하며 떠나는 게 고작이었다.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혁명적인 노선을 들고 왔던 NL계의 김영환이나 PD계의 사노맹 역시 대중에 대한 책임감도 진실한 해명도 없이 가장 급격하게 변신해 버렸다. 이러한 행동은 세상을 너무 가볍게 보는 일부 급진적인 소영웅주의자들의 객기였으며, 운동과 대중에 대한 무책임의 표본이라는 생각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천신만고의 고생을 감내하며 이루어낸 것이 1987년까지의 민주화 투쟁이었다면, 후배들은 그 성과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수면위로 올라 온 후배들은 노력의 합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배들이 쌓아올린 대중들의 신뢰와 믿음을, 노선투쟁으로 밀어내고 현장을 장악했다. 각자가 키워 온 '골방 학습조'를 이끌고 숫자의 우위를 확보하여 현장조직을 건설하고 장악했다. 그들이 현장에 보여준 모습은 내부 권력투쟁의 치열함과 비겁함이었고 현장노동자들에게 운동에 대한 절망과 환멸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운동권의 전망을 상실케 할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토록 목숨을 걸고 이루려던 운동의 대의에 대한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며, 어떠한 해명이나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현장을 떠나갔다. 현장출신들이 노동운동 탄압에 항거하며 구속과 해고, 징계를 무릅쓰고 투쟁할 때, 학출의 일부는 학교로 또는 관리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경력을 팔아 보수정당의 품으로 안겼다.
갈 곳이 노동현장밖에 없는 현장출신들이 화려한 입신출세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역시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였다. 이때부터 현장노동자들은 학출과 지식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또 다른 논리로 다가와, 개인의 사적이익을 실현하는 도구와 대상으로 이용할지 모르기에, 신뢰는 금이 갔고 불신이 증폭되었다. 그들의 객기는 노동현장에 수많은 상처와 함께 파벌을 조성했고, 썩어빠진 뿌리와 씨앗을 남기고 갔다. 조금 가혹하게 비판을 하는 것 같지만, 열심히 투쟁하고 고생한 것을 인정하는 것과 행동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한 때는 운동 발전에 기여했으나…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분단국가에서, 서슬퍼런 군사독재와 국가보안법이라는 감시체제 아래서 진보운동은 공론의 장을 통해 풍부하고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며 대중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보였다. 사상의 자유가 제한된 지하공간에서 접한 한정된 이념서적과 노선정립은 한계를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에 기초하여 검증되지 못한 이념과 노선은 관념에 치우쳤다. 현장과 대중에게 접목시키는 데 설득력을 상실했고, 대중이 믿고 따를만한 지도노선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현장의 정파들이 학생운동 중심의 단순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뛰어 넘어 과학적 사상에 기초한 사회변혁운동을 성장, 발전시킨 공로는 긍정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NL과 PD로 대표되는 한국사회변혁운동의 방향과 실천노선을 구체화, 풍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주통일과 계급투쟁의 성격과 과제를 두고 대립한 측면도 있지만, 노선과 이론을 크게 발전시킨 기여를 했다. 따라서 우리는 정파가 운동발전의 과정상 긍정적인 측면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외환위기 사태 이후 변화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파이건 올바른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체제가 변화하고 착취의 방법이 비정규직을 이용하는 것으로 달라졌을 뿐 노동자·서민의 삶은 더욱 가난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에도, 현존하는 정파는 혼돈과 혼란만 거듭할 뿐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권력과 출세의 도구로 전락한 정파에 줄을 서고 있는 현장조직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여 진보운동의 최대위기를 키우고 있다. 현존 정파가 '사적 권력추구'라는 천박성을 벗지 못하는 한 그들에게 전망은 없다.
정파운동에 위기가 도래한 것은 관념성, 파벌성, 무능력성이라는 세 가지의 현상으로 진단할 수 있다.
첫째,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모호한 기존 이론을 관념적, 교조적으로 도입하는 문제점을 노출했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사실에 기초하여 풍부하고 다양하게 조망하기보다 파벌과 분파가 가진 논리를 무리하게 확산시켜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통에 불필요한 노선투쟁과 소모적이고 분열적인 논란만을 격화시켰다.
둘째,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부정적인 논쟁으로 노선에만 따르는 이기적인 파벌화와 줄세우기를 낳았다. 토론과 대화를 통한 노선대립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대안과 정책을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정파운동은 같은 운동권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정파적 이해에 따라 불필요한 논란과 대립을 만들어 오히려 갈등을 키웠다.
셋째, 학생운동 출신들의 노동운동 진출은 현장 출신들이 노동운동 주체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고 일정한 이론적 기반이 형성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이론과 노선 중심의 관념성은 사회의 관리체제 변화에 따라 대중운동의 새로운 발전 전망을 열어주고 제시하는 설득력을 상실했으며 무능력만 노출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 세 가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정파운동이라는 파벌과 줄세우기의 낡은 시스템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천박한 재벌과 반대편에서 똑같이 구는 상대하는 운동권의 천박한 논리수준으로는 결코 대안을 성장시키지 못하며, 대중의 지지도는 더욱 낮아지고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당할 것이다.
기본은 상대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 민주노총을 중심에 놓고 권력 각축을 벌이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들도 각자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과 한계도 분명해졌다. 공통된 한계점은 여전히 집행권력 장악을 중심에 두고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그리고 정책대안보다는 숫자로 승부를 가리려 한다는 점이다. 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전개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모두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정파와 현장조직들의 파벌주의가 운동발전에 폐해를 가져온다 해도 당장 해소되거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세력간의 지나친 대립관계를 '제로섬게임'으로 인식해야하고 무조건적인 줄서기나 개인적 권력추구와 야합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현실 실천의 경험과 전체운동의 발전을 중심에 놓고 각 세력이 지니는 문제의식의 장단점을 종합하여 전체운동이 직면한 근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립과 대결 중심의 이분법적 운동논리는 분화와 분열만 만들어 왔다.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내리먹이는 운동방식에 대중들은 환멸을 느끼고 있다. 이젠 사소한 차이에 대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죽고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공존전략과 모아 나가는 '플러스게임'만이 운동을 새롭게 발전시킬 유일한 대안이다.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도자'인가 '지배자'인가 정파간의 적대적 대립관계는 현장의 분화와 분열의 폐해를 가져왔다는 게 '노동운동의 위기'와 관련한 논쟁에서도 수 차례 지적되고 있다. 이는 단결투쟁의 기본원리에도 전혀 맞지 않음 또한 검증되고 있기에 노동운동이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줄을 서고 있지만 대안이 되지 못하면 대오는 이탈하여 새로운 희망을 찾아 갈 것이다.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은 대전환기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음에도 그런 상황에서 정파가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이란 걸 직시해야 한다. 보스와 가신 중심의 낡은 정파시스템은 새로운 흐름과 변화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
대중은 구시대 정파의 이념적 노예가 아니다. 대중은 말과 글로 표현하는데 서투를 지 모르지만 평생을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살아 왔기에 직관과 본능으로 지도자와 지배자를 구분할 줄 안다. 때로는 기나긴 고통의 세월도 참고 견디며 후일을 기약할 줄도 알고, 결정적 시기에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며 투쟁에 나설 줄도 안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대중들은 누가 대중을 중심에 두고 운동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허구와 기만으로 포장한 거창한 이념과 이론도 필요 없다. 대중보다 먼저 솔선수범하는 자는 지도자요, 대중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는 지배자이다. 대중에게 지도자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지배자는 타도의 대상이다. 새로운 흐름이란 대중을 신처럼 생각하며 실천하는 운동 본래의 모습이다. 대중은 운동과 반동을 구분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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