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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투쟁 일반론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7. 4. 20.

임금 투쟁 일반론

 

 

   대부분의 물건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다. 그러므로 모든 좋은 것은 노동을 해서 그것을 생산한 사람들에게 속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시대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노동하고 다른 사람은 노동하지 않고, 또 노동의 결과의 대부분을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가져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며,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사회가 서로 대립하는 여러 계급으로 분열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러 계급의 적대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노예제나 봉건제 시대와 마찬가지로 ‘착취’는 존재한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이 생산한 생산물을 그 대가 전부를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빼앗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착취받는 사람은 일부의 시간은 자신을 위해 일하고, 일부의 시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 예를 들어, 하루 10시간 일하면 5시간은 노동자 자신을 위해 일하고, 나머지 5시간은 다른 사람(자본가)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착취는 상당 부분 은폐된다.

 

  과거 노예가 착취당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생산한 전부는 노예주의 것이 되었다. 물론 일하려면 노예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음식, 의복, 주택에 대한 비용은 그가 생산한 것에서 충당해야 했다. 주인은 나머지 전부를 갖고 그것으로 생활했다.

 

또한 농노가 착취당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농노는 노동시간의 반을 자신의 토지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영주의 토지에서 영주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가령, 1주일에 3일은 농노가 자기 땅에서 일하고, 나머지 3일을 영주 땅에서 일하는 식이다. 이때 이 나머지 3일의 노동이 “착취당하는 노동”이었다. 결국 영주 혹은 지주는 농노의 노동으로 생활했고, 착취는 분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노예나 농노에 대한 착취만큼 분명하게는 알 수 없다. 노예나 농노와 달리, 노동자는 노예주나 영주를 위해 강제로 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일할 수도, 일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고용되서 사장을 위해 일하게 되면, 노동자는 주말이나 월말에 일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이 임금은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지급받는 ‘노동의 대가’처럼 느껴진다. 가령 결근을 하면 덜 받고, 잔업과 특근을 하면 더 많이 받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착취되는 것일까? 깊이 파고 들어가서 이 문제를 연구해 보자.

  

 

상품의 가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팔 물품을 생산한다. 일찍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재화를 생산했으나, 오늘날에는 시장에 내놓기 위해 상품을 생산한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드는 옷은 상품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팔기 위해, 화폐나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 만든 옷만이 상품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자신을 위해 옷을 만들어 입는 소수의 사람들은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산골 깊은 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옷을 지어입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회의 생산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공장에 모여서 수십만 벌의 옷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일하고, 이것을 자본가가 시장에서 전국의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생산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즉 직접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환과 판매를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며 자본주의 제도는 이렇게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옷, 구두, 자동차, 배, 컴퓨터, 오디오, 과자 등의 상품의 값어치가 얼마인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종류의 상품, 예를 들면 정교한 시계의 가치를 수십 만원으로 치는 반면에, 다른 상품, 예를 들면 당근주스나 볼펜의 가치를 몇천원이나 몇백원밖에 치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 대답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 정교한 시계나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노동자의 긴 노동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당근주스나 볼펜을 만드는 데에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대단히 적은 시간만 일해도 충분하다. 이처럼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드는 데 드는 노동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즉, 한 벌의 옷을 만드는 데 16시간이 걸리고, 한 켤레의 구두를 만드는 데 8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옷은 구두보다 두 배의 가치가 있으며, 시장에서 한 벌의 옷은 두 켤레의 구두와 교환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상품이란 어떤 노동을 다른 노동과 교환하는 것에 다름 아니므로, 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따라 가장 올바르게 평가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류는 대단히 많다.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 빠른 노동과 느린 노동, 능률이 높은 노동과 낮은 노동, 기계노동과 손발을 이용한 노동 등이 그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경제 법칙이 진실이라면, 더디고 능률이 낮은 노동자가 생산한 한 켤레의 구두는 빠르고 능률이 높은 노동자가 생산한 한 켤레의 구두보다 가치가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시간이 더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의 정의를 좀더 정확히 내려야만 한다.

 

  어떤 종류의 노동은 빠르고 어떤 종류의 노동은 느리다. 어떤 공장에서는 능률이 높은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는 반면에, 다른 공장에서는 능률이 낮은 낡은 기계를 사용한다.

 

그런데 하나의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그 의미를 쉽게 말하면, 평균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평균적인 숙련도의 노동자가, 평균적 노동강도로 일할 때 드는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과학적 검토가 노동자가 노예나 농노처럼 노동시간의 일부밖에 자신을 위해 투입하고, 나머지 시간은 주인을 위해 일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후 살펴보겠지만 확실히 관계가 있다. 생산수단을 갖지 않지 않은 노동자가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는 하나의 방법밖에 없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고용되서 ‘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는 상품 판매자가 된다. 시장에 상품을 내놓는데, 그 상품이란 일을 하는 능력 즉 노동력이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파는 것은 몸 전체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는 몸뚱이가 거래되는 노예일 것이다. 노동자가 파는 것은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노동능력”(노동력)이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서 사는 것은 이것이고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은 이 노동력 사용의 대가이다. 그리고 이 노동력을 자본가가 사용하는 장소가 생산 현장인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가 자신의 상품 즉 노동력을 임금을 받고 고용주에게 파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손으로 일하는가, 머리로 일하는가,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가, 타자기의 자판을 두드리는가, 시간급으로 일하는가, 능력급으로 일하는가 등의 구별은 관계없다. 노동의 성격과 무관하게, 사장에게 고용된 노동자들 모두는 노동력을 임금을 받고서 파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품 판매의 대가는 무엇인가? 노동자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임금이다. 이처럼 “노동력 판매의 대가”가 임금이다. 노동자는 얼마만큼 임금을 받을까? 그 임금의 크기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의 열쇠는 노동력이 상품이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 법칙에 의해 임금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임금)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노동력이란 상품의 가치는 무엇일까? 자동차의 가치가 거기에 투입된 부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조립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의 총합이라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시간의 총합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능력은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에(거기다가 노동력의 공급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미래 노동자를 키우는 수단인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 필요한 음식, 옷, 주택, 교육비용 등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결국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의 크기는 해당 노동자의 노동능력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 수단을 모두 합한 가치가 된다. 바꿔 말하면, 공장 사장이 주 44시간의 노동을 시키고 싶다고 할 때, 그는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생활하기에 충분하고, 또한 그가 나이를 먹어 일하지 못하게 되거나 죽을 경우에 뒤를 이어야 할 아이들을 기르는 데 충분한 정도의 가치(돈)을 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물론 ‘생활하기에 충분한’이라는 조건은 똑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그것은 한국, 일본, 미국, 중국에서 각각 다르다. 그것은 기후나 그 밖의 자연조건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다.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욕망(그가 필요로 하는 음식, 옷, 주택)은 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에서 다르고, 사막과 산지에서도 다르다. 국민의 역사와 전통 및 문명의 정도 또한 ‘생활하기에 충분한’ 정도를 결정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다.

 

가령 사람들은 주변의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생긴다. 세계의 모든 물품이 상점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예컨대,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컴퓨터, 핸드폰은 물론이고 자동차까지도 북한의 노동자가 쌀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필요한 생필품으로 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육체적으로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비용에 덧붙여서, 컴퓨터나 오디오, 냉장고를 사고, 때때로 영화감상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비용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 이런 비용들을 모두 더하면, 노동력 재충전 비용으로서 임금이 결정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생계비 조사”, “장바구니 조사” 등을 통해 “4인가족, 독신자” 등의 최소 임금 수준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법칙, 특히 노동력이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려야만 하는 임금노예 법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 이 임금 수준을 초과해서 더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호황기에 일손이 부족하면 노동자는 평균적 임금을 능가하는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금을 가능한 한 최저한도로까지 끌어내리려는 압력이 언제나 작용한다.

 

대표적인 예로, 자본주의 사회의 경향은 점점 실업을 증대시켜 간다. 이것은 노동자의 고용을 위협해 실질임금을 다시 낮추는 경향으로 작동한다. 특히 IMF 사태처럼 실업자가 많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은 평균적 임금보다 더 낮은 수준의 저임금을 강요받는다. 결국 장기간에 걸쳐 임금을 계산해보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라는 임금 법칙이 그대로 관철된다.

  

이렇듯 노동자의 임금을 단지 먹고 일하며, 미래의 노동자를 낳고 키우는 데 적합한 최소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자본주의 경제법칙 때문에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행동은 소용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 아니,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

 

임금이 최저의 수준으로 추락해버리는(실업이 널리퍼지는 시기에는 이 수준보다 더 내려가 버리기조차 한다) 것을 노동자는 막으려고 한다. 이 경우, 단 한 가지 방법은 치열한 투쟁밖에 없다. 투쟁하지 않는다면 자본은 노동자들을 삶의 벼랑끝으로까지 몰아갈 것이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 임금만을 지급할 것이다. 심지어는 해고시켜 굶어죽으라고 강요할 것이다.

 

  그런데 대기업의 대변자는 우리에게 노동자가 임금을 인상시키는 단 하나의 길은,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회사 파이를 키워야 노동자의 임금도 늘어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노동자의 임금은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의 가치에 따르며, 그 가치는 노동자가 간신히 살아가는 비용과 동등하다.

 

노동조합 운동이 임금을 인상시키는 것이지, 생산이 증가되었다고 해서 단순히 임금이 인상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가 기본적인 임금이라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단결해 투쟁하는 경우에 국한되며, 이 단결과 투쟁이 없다면 노동자는 기본적인 임금 수준보다 더 낮은 극단적 저임금, 즉 굶어죽지 않고 일할 정도의 최저 임금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시장에서 거래할 때, 상품 판매자가 아무런 힘이 없을 때 구매자는 완전 헐값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이치와 똑같다.

 

  이윤을 계속 늘려야 살아남는 계급임을 고려할 때, 사장은 생산이 증가한다고 스스로 임금을 인상시킬 사람이 절대 아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점을 믿기 어렵다면, ‘왜 고용주는 임금을 인상시켜야만 할까’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자본가인 고용주는 노동자를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고용주는 단지 이윤을 얻기 위해 회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이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물론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상품을 생산해야 하므로 고용주는 기계를 움직이는 노동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계속 능률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계에 기름을 주고 수리하며 연료를 공급하듯이, 음식과 옷, 그밖에 노동자가 목숨을 부지하면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은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줄 필요가 있다. 그만큼의 임금(노동자가 살아 갈 만큼의 임금)은 반드시 지불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정도 수준의 임금을 자본주의 법률은 “최저임금제”로 규정해 놓고 있다.

 

  만일 노동자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필요한 노동자가 시장에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면(즉 취업을 희망하는 노동자가 충분히 있다면) 자본가는 그 최저 임금 이상을 결코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생산성이 높아져도 노동자에게 ‘겨우겨우 먹고 살만큼’ 최저 임금만을 주려 할 것이다.

 

만약, 자본가가 생산성 향상의 대가로 성과급을 조금 준다고 할지라도(이것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다면 자본은 주려 하지 않지만), 그 성과급은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높이느라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소비한 대가일 뿐이며, 노동자들을 앞으로도 계속 효과적으로 부려먹기 위한 얄팍한 속셈으로 던져주는 것일 뿐이다. 결국 다음이 분명해진다.

 

임금법칙의 한도 내에서, 노동자들이 무언가 더 나은 임금을 획득한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한 덕분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과 없는 사업장의 평균 임금의 엄청난 차이를 상기한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착취라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이윤은 어디에서 나올까? 과연 자본가들의 말처럼 이윤은 시장에서 비싸게 판매해서 얻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윤은 노동자를 쥐어짜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들은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으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파고들어가 보자.

 

가령 철강 자본가는 철강의 가격을 그 값어치 이상으로 인상시킴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일까? 자동차 자본가는 자동차를 그 값어치 이상으로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일까? 이윤이 유통과정을 통해 생길 수 없음은 분명하다.

 

만일 자동차 조립 공장 자본가가 자동차를 그 값어치 이상으로 팔아서 이윤을 남긴다면, 마찬가지로 자동차 부품 공장 자본가는 부품을 그 값어치 이상으로 팔아서 이윤을 남겨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는가? 자동차 조립 공장 자본가는 자기가 “비싸게 판매해서 얻는 이익”을 부품을 비싸게 구매함으로써 발생하는 “손실”과 맞바꾸어야 한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자들도 부품 가격을 인상으로 판매에서 얻는 이익을 철강 구매에서는 잃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판매가격을 높여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도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된다. 결국 뱅뱅도는 회전목마와 같은 판매와 구매 과정에서는 결코 이윤이 탄생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상품이 특히 필요해서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사려는 고객을 이용해 제조업자 개개인이 “바가지”를 씌울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회 전체로서 보자면 이러한 거래로부터는 전혀 이윤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명의 제조업자가 운좋게 바가지를 씌워 이윤으로 얻는 만큼 고객(이들은 자본가일 수도 있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을 볼 때 이익과 손해는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한 푼의 이윤의 증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교환 과정”에서 이윤이 나온다는 설명은 이미 만들어진 이윤을 누가 얼마나 가져가는가는 설명할 수 있어도, 이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도둑놈들이 도둑질한 물건을 많이 가지려고 다투면서 서로 바가지도 씌우고 바가지도 쓰고 하지만, 이로부터는 단 한 푼도 탄생하지 않으며 오직 도둑질로부터만 ‘금은보화’가 생겨난다는 이치와 똑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금은보화가 어떻게 생겨났느냐, 다시 말해 “이윤의 분배”가 아닌 “이윤의 탄생”이다.

 

  따라서 이윤의 발생을 다루는 이상, 우리는 전체 자본가가 언제나 자신의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자본가가 자신의 상품을 실제의 가치대로 교환하면서도 이윤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일어날까? 거기에 대한 답은 교환의 과정에서가 아니라 생산의 과정에서 나온다. 이 생산의 과정이 곧 도둑질하는 과정이다. 자본가계급의 손에 들어가는 모든 이윤은 생산과정에서 나온다.

 

 

  이윤의 비밀

 

  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구두공장을 예로 들어보자. 노동자가 하는 일은 공장의 기계를 사용해서 가죽이라는 원료를 구두라는 완성품으로 바꾸는 노동이다. 이 노동과정에서 착취가 일어나며, 이 착취로부터 이윤이 발생한다. 예컨대 원료인 가죽의 가치가 2만원이었다고 하자. 그러나 완성된 구두인 가죽의 가치는 10만원이다. 왜 그럴까? 전보다 가죽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오히려 잘라버린 부분이 있으므로 가죽은 적어진다). 가죽의 가치가 높아진 이유는 여기에 노동이 새롭게 더해진 데 있다.

 

구두 상태의 가죽은 원단 형태의 가죽에 비해 자르고 구두실로 꿰매고 본드로 접착시키며 구멍을 뚫는 등의 노동이 가미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전보다 많은 양의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의 결과가 바로 2만원짜리 가죽이 10만원짜리 구두로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결국 원료를 완성품으로 바꾸는 노동을 통해 노동자는 새로운 부를 낳고 새로운 가치(이 예에서는 8만원의 가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구두 제작 노동자가 만들어 낸 이러한 새로운 가치는 모두 노동자의 손에 들어갈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선 고용주의 손에 들어간다. 고용주는 구두를 10만원의 정상 가치로 판매한 뒤, 그 중 2만원을 원료를 공급한 업자에게 지불한다. 이제 8만원이 남는다. 그런데 이 8만원을 노동자들에게 지불할까? 아니다. 고용주는 그 일부분만을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만일 임금이 4만원 정도라면, 고용주는 4만원을 챙긴다. 바로 이것이 이윤을 구성한다. 이 경우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4만원을 강탈해간 셈이다. 만약 노동시간이 하루 8시간이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4시간 동안 공짜로 부려먹은 셈이 된다. 이윤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에게 바치는 공짜노동(잉여노동)과 그것을 가치로 환산한 잉여가치가 이윤의 뿌리인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본주의제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 보자.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될 때, 그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능력(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사는 대가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정도(겨우 먹고 살만큼)의 임금을 준다. 그러나 그 임금(위의 예에서는 4만원이며, 4시간 노동에 해당한다)에 해당되는 노동시간 이상으로 마구 부려먹는다.

 

  이처럼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전체 대가”가 아니라 단지 겨우 먹고 살면서 계속 자본가들을 위해 노동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비용에 불과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노동자는 그 노동력을 하루라는 노동 일의 길이 ― 예컨대 8시간 ― 로 판다. 이것은 근로계약서로 약정되어 있다. 그런데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에 해당하는 노동 시간이 4시간이라고 하더라도, 4시간만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노동자는 8시간 일하도록 고용되었다. 따라서 노동자는 4시간을 더 계속해서 일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머지 4시간 동안 노동자는 이 점을 스스로 알든 모르든 객관적으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한다. 여기서 그는 노동의 일부(첫번째 4시간의 노동)는 지불받는 셈이고, 노동의 나머지 일부(두번째 4시간의 노동)는 지불받지 못한다. 그런데 구두에 투입된 노동은 4시간분이 아니라 8시간 분의 노동이므로, 그 상품을 가치 이상이 아니라 그 가치대로 팔아도 고용주는 이윤을 얻는다.

 

결국 고용주의 이윤은 노동자의 지불받지 못하는 노동, 즉 자본가를 위해 공짜로 해주는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윤은 생산과정에서 이뤄지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부터 만들어지며, 판매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생산물(상품) 형태가 판매를 통해 화폐 형태로 바뀌는 것뿐이다.

 

  물론 자본가는 이 판매에 대해서도 대단히 집착한다. 왜냐하면 판매되지 않으면 이윤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정육점에 가서 돼지고기 10근을 샀다고 치자. 하지만 10근을 모두 유용하게 사용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가령 5근은 먹고, 나머지 5근은 부엌에 며칠 동안 그냥 두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상해버려 절대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머지 5근의 보관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똑같은 일이 판매에서도 일어난다. 분명 자본가는 노동자를 쥐어짜서 10근의 이윤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10근의 이윤은 판매를 통해 섭취해야 한다. 만일 판매가 잘 되지 않으면 자본가는 10근의 이윤 중에서 일부만을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상하고’ 만다. 가령 오랫동안 재고 상태로 있다가 폐기처분되거나, 아니면 덤핑으로 손해보고 넘겨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에게는 똑같다. 5근이 보관 부주의로 상했다고 정육점에 찾아가서 환불해달라고 하면 정육점 주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판 것은 분명히 10근이었다!”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불황이나 공황 때문에 판매가 부진해 이윤의 일부만을 실현하거나 심지어는 손해볼지라도, 노동자는 노동과정에서 엄청나게 착취당했다.

 

단지 이렇게 생산과정에서 착취한 이윤을 판매과정에서 자본가가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적 생산 체제로서 수시로 과잉생산, 불황, 공황을 야기하는 자본주의 체제, 즉 전체 자본가계급의 책임일 뿐이다. 여기서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 “불황, 공황시에도 노동자들은 절대 양보교섭으로 임금을 삭감당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본가가 져야할 책임일 뿐이다.”

 

  노동자에게 자본가가 지불하는 것(임금)보다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하는 것(만들어내는 가치)이 훨씬 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차액을 우리는 잉여가치(잉여노동, 공짜노동)로 부르는데,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고용주의 손에 들어가는 이윤이 된다. 가령 노동자가 하루에 4만원을 임금으로 받는데, 그가 생산한 가치가 8만원이라면, 차액인 4만원이 잉여가치로서 자본가의 손에 들어가는 이윤이다.

 

그런데 잉여가치는 공장주가 얻는 순수한 이익은 아니다. 자본가가 그것을 전부 자신의 손에 넣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가운데 일부를 공장 부지의 소유자인 지주에게 지대로 지불해야 할 지도 모른다. 또한 그 가운데 일부분은 이 상품을 구입해 시장에서 대신 판매하는 도매업자와 소매 업자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윤의 일부는 세금, 뇌물이란 형태로 정부에 들어갈 수도 있고, 접대비로 유흥가에 흘러들 수도 있다. 특히 자본을 빌려준 은행가들은 이자라는 형태로 이윤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이들 은행가, 토지 소유자, 정부 고위 관리, 상업 자본가 등등이 모두 전체로서 자본가계급을 구성하며, 이들은 노동과정에서 생산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도둑질한 것들을 서로 나눠가진다. 사냥은 암사자가 하지만 잡은 사슴은 숫자자가 함께 먹듯이, 노동자에 대한 직접적인 착취는 공장 자본가가 하지만 착취한 결과물인 이윤은 모든 자본가들이 서로 나누어 먹는다.

 

  결국 잉여가치는 생산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첫 번째 자본가의 손에 전부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결국 전부 자본가‘계급’의 손에 들어간다. 지주와 금융업자의 손에 들어가는 부분이 크냐 작으냐는 우리에게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도둑놈들끼리의 분배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도둑들 모두로부터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잉여가치(노동자의 공짜 노동)가 공장주 이윤, 지대 및 이자의 뿌리라는 사실, 즉 모든 형태의 잉여가치가 노동자계급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이러저러한 자본가 무리들이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임금투쟁은 이 흡혈귀들에 맞선 노동자의 저항의 출발점이다.

 

 

  임금의 제반 형태

 

  임금의 형태에는 주요하게는 시간급제, 성과급제 형태가 있다. 각각의 형태 모두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은폐하지만, 과학적으로 검토하면 착취를 밝힐 수 있다.

 

  우선 시간급제. 시간급이 정해지면 마치 노동자가 노동한 만큼 노동자가 가져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가령 시간급이 6000원이고 한달에 200시간을 일한다면, 그리고 일단 잔업, 특근은 제외하고 검토한다면 이 노동자는 한달에 120만원을 가져갈 것이다.

 

만일 몸이 아프거나 가정일로 한달에 150시간만을 일했다면 이 노동자는 90만원을 가져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의 머리 속에는 마치 “임금은 내가 노동한 만큼 받는 것이다”는 생각이 자라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환상이다. 왜냐하면 1시간당 지불받는 임금이 6000원이지만, 이 1시간당 노동자가 생산한 것은 15,000원일 수 있으며,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노동자는 1시간 일할 때마다 9,000원의 이윤을 자본가에게 갖다 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계산은 달라진다. 만일 한달에 200시간을 일했다면, 이 경우 노동자는 180만원의 이윤을 매달 자본가에게 갖다주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는 임금을 더 지불해야 하지만, 결근하지 말고 출근하라고 독촉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출근해서 일하는 만큼 자본가는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제 잔업과 특근으로 넘어가보자. 자본가는 노동자를 위해서 일부러 특근과 잔업을 잡아주는 것처럼 말하면서, 잔업과 특근을 하면 자본가가 더 손해라고 엄살을 떤다. 이것이 진실일까? 과연 자본가가 그처럼 인간적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잔업 수당 50%를 덧붙여도 1시간 당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9000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1시간당 창조하는 가치는 위의 예에 따르면 15000이므로 자본가는 6000원의 이윤을 챙기는 셈이다. 특근의 경우에도 노동자가 100%의 수당을 포함해 12000원을 가져가도 자본가는 여전히 3000원을 챙긴다. 단지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이 조금 줄어들 뿐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잔업과 특근을 시키는 것이 여전히 이익이다.

 

  게다가 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우선 잔업과 특근이 없다면, 생산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추가 고용해야 하는 인원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하더라도, 공장 부지 사용료는 한 푼도 추가 지불할 이유가 없다. 기계나 원료의 자연 마모분 또한 절약할 수 있다. 그냥 쉬는 공장이라면 손실로 처리될 “설비, 기계 감가상각비”가 잔업과 특근을 통해 구제된다.

 

마지막으로 경기와 유행을 타는 최신 산업이라면 시간이 늦기 전에 라인을 최대한 돌려서 이윤을 뽑아내야 한다. 기계는 아주 견고하지만, 유행이 지나면 고철덩이로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에서 엄청난 이익이 얻어지므로, 자본가는 잔업과 특근을 통해 일정한 추가 수당을 지불해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많은 이익을 남긴다. 노동자를 위해 잔업과 특근을 마련해 준다는 사장의 얘기는 완전 거짓말이다. 단지 경기가 불황이라서 생산해도 남는 것이 없을 때만, 잔업과 특근을 시키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을 던져보자. 잔업과 특근 수당을 지불하는 것은 임금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일까? 이 경우 과연 노동자는 ‘덜’ 착취당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임금에 대한 기본 정의로 되돌아가 보자. 임금이란 ‘노동능력 재생산 비용’으로서 노동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총비용의 합이다. 그런데 노동능력은 매 시간 당 똑같이 마모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재충전 비용 또한 차이가 발생한다.

 

노동력은 노동시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급속하게 마모되는 특징이 있다. 가령 주중의 8시간 노동과 일요일 특근의 8시간 노동은 질이 다르다. 주중의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일요일 노동은 노동력을 훨씬 빠르게 마모시킨다. 게다가 일요일까지 일하게 되면, 그 다음주 노동은 더욱 힘들어지며 노동력 마모 정도는 엄청나게 많아진다.

 

  또한 8시간 노동 이후, 잔업 시간에 수행하는 2-3시간 노동은 아주 힘들다. 그만큼 노동력이 더 많이 마모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렇게 마모된 노동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는 그만큼, 노동력 재충전 비용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잔업 수당이나 특근 수당’이다.

 

따라서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잔업과 특근 수당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인 임금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만일 잔업과 특근 수당이 없어지거나 최소한 줄어든다면 바로 그만큼 노동자는 ‘더 많이 착취’당하는 셈이다.

 

  성과급제 임금은 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가령 1개 생산당 임금으로 지불하는 금액이 만원이라고 치자. 만일 노동자가 하루에 7개를 생산하면 7만원을, 10개를 생산하면 10만원을, 3개를 생산하면 3만원을 받는다. 이 경우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인 것처럼 느껴지는 왜곡이 더욱 심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노동자의 임금은 마치 노동자의 숙련도나 성실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급제와 똑같이 성과급제에서도 착취가 자행된다. 가령 제품 1개당 노동자가 투입하는 실제 노동이 2만원의 가치가 있다면, 노동자는 제품 1개당 1만원은 임금으로 받고 나머지 1만원은 자본가에게 공짜로 빼앗기는 것이다.

 

  그런데 성과급 제도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성과 가장 부합하는 임금 형태로, 자본가들은 성과급제도를 확대하려 노력한다. 그 이유는 우선은 성과급제도는 관리비용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몇 개를 뽑아내느냐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므로, 노동자들은 관리자의 통제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죽어라고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택시기사나 영업 사원들처럼 노동이 개별적이므로 공장에서처럼 관리자들이 집중적으로 감시 통제할 수 없는 분야에서는 성과급 제도가 보편화되게 된다. 여기서 성과급 제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노동자 뒤에서 감시 통제하는 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다음으로 성과급 제도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분열시키는 데 적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성과급이 적용되면 노동자는 관리자의 근무 평점에서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만 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저항력을 없애버린다.

 

마지막으로 성과급 제도는 노사협조주의를 보급하는 수단이 된다. 이윤이 많이 남을 때는 특별 성과급을 지급하고, 이윤이 적어지면 성과급을 없앤다면 노동자들은 임금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회사가 잘나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의 성과급은 노동자의 투쟁의식을 마비시키면서 노사협조주의의 포로로 묶어두는 장치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임금 제도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지만, 아직 힘이 부족해 임금 제도를 철폐할 수 없을 때는 차선책으로 ‘성과급이 아닌 기본급제’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노사협조주의와 경쟁논리를 보급하는 성과급제 철폐를 위해 투쟁하면서, 기본급 인상을 임금 투쟁의 핵심 기조로 분명히 해야 한다.

 

 

  임금 투쟁과 임금 법칙

 

  임금 투쟁은 임금 법칙을 철폐할 수는 없지만, 임금 법칙이 노동자에게 너무나 불리한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역할은 수행할 수 없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자가 아무리 투쟁하더라도, 착취를 없앨 수 없으며 임금 법칙의 관철을 저지할 수도 없다. 노동해방 투쟁 없이 강도 높은 임금 투쟁만으로 착취를 점차 줄이다가 아예 없애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 환상이다.

 

만일 임금 투쟁을 통해 자본가의 이윤 자체를 결정적으로 잠식해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시 떠올려 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사회”로서 이윤이 생산의 기본 동력이다. 만일 이윤이 거의 남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며, 직장폐쇄 등으로 자본을 철수할 것이다. 그것은 자본가의 권리이며, 자본주의 법률은 신성불가침의 소유권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보호한다.

 

뿐만 아니다. 노동조합의 임금 투쟁 때문에 이윤이 상당 부분 잠식된 기업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극한대의 세계 경쟁 체제 하에서는 새로운 기계, 새로운 설비, 새로운 기술 등에 계속 추가 투자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도태되어 망할 수밖에 없다. 이 ‘추가 투자 비용’은 전적으로 자본가의 이윤에서 지출된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을 유지하고 이윤을 증식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계속 이윤의 대부분을 추가 투자해야만 한다. 이것은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다.

 

  생각해 보자. 반도체 업종은 약 1년만 시설 투자를 하지 않으면 곧 도산 위기와 맞닥뜨려야 한다. 자동차 업종도 약 2년만 시설, 기술에 투자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져 위기에 빠진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이 지나치게 높으면 투자 비용이 줄어들어 기업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자본가의 하소연은 단지 엄살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들은 한 가지 점은 빼놓는다: “시설 투자하여 확대된 자본은 누구의 소유인가? 결국 시설 투자로 재산이 증식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의 도산 위기가 노동자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있다. 어느 기업이 도산하면 문제는 단지 일개 자본가의 파산이 아니다. 여기에는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의 생존이 함께 걸려 있다.

 

따라서 아무리 강성 노동조합이라도 노동해방을 통해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경쟁 체제를 없애버리려 하지 않는 한에서는 실업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하게 임금 투쟁을 자제하거나 어느 수준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심지어 공황기에는 임금삭감까지도 받아들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모두 실업의 위협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임금 법칙은 노동조합 임금 투쟁만으로는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노동자는 호황기에는 정상적인 임금 수준 이상을 받아낼 수 있지만, 이것은 불황과 공황시의 극도의 저임금과 서로 상쇄된다.

 

결국 이 점이 분명해진다. 노동조합의 임금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예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착취 철폐, 즉 임금 노예 제도 철폐는 노동조합의 일반적 임금인상 투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생산체제를 넘어서는 노동해방 체제를 건설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임금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이 임금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더 멀리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과 직장 폐쇄, 기업의 경쟁력 약화 등의 압력 하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조합은 다음의 질문에 맞닥뜨린다: “우리의 임금 투쟁은 너무나 정당하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있다. 만일 완전히 착취를 끝장내려 한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노동해방의 전망을 추구해야 한다. 이 전망이 없다면 실업의 압력 때문에 우리는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심한 임금 투쟁에 만족해야 하며, 불황과 공황기에는 임금 삭감이나 저임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국 문제는 간단명료하게 제기된다. 노동해방으로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노예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진정 노동자의 생존을 대변하려는 전투적인 노동조합이 단순히 임금 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갖도록 밀어붙인다는 점에 임금 투쟁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해방의 전망을 갖는 선진 투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그것은 가능해진다.

 

만일 이런 해결책을 갖고 있는 선진 투사들이 없다면, 결과는 비참해진다. 도산이나 법정 관리 등으로 한번 호되게 당한 노동조합은 기업의 경쟁력을 고민하는 소심한 노동조합으로 변질한다. 그런데 기업의 경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착취해서 더 많은 이윤을 자본 축적에 사용하느냐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족쇄에 묶인 노동조합이란 착취에 투항하는 노동조합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 임금 법칙(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라는 법칙)은 만일 노동자가 전혀 저항할 수 없다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관철된다. 임금 법칙은 일정 정도는 ‘가변적’으로 작동한다. 저항하지 못하는 노동자라면, 자본가는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최소 비용말고는 전혀 지급하지 않을 것이다. 먹는 것도 아주 값싼 것에 제한할 것이고, 자는 것은 비좁은 월세, 전세방을 강요할 것이다.

 

  한마디로 밥먹고 자고 아이 기르고 일하는 것밖에 모르는 ‘노동하는 원숭이’처럼 노동자를 취급하면서 극도의 낮은 재생산 비용만을 지불할 것이다. 반대로 단결해 저항하는 노동자라면, 자본가는 약간의 추가 비용을 지급할 것이다. 이것은 나라별로도 적용된다. 노동운동의 힘이 약한 나라는 임금 수준이 상당히 낮을 것이고, 강한 나라는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다. 다음의 원칙이 적용된다: “정상적인 임금 수준이라도 확보하는 것은 오직 노동자가 단결 투쟁할 때에 국한된다. 단결 투쟁이 없다면, 노동자는 정상적인 임금 수준보다 낮은 극도의 열악한 임금마저 강요받는다.”

 

  그러나 ‘가변성’은 일정 한도 내에서만 작동할 뿐, 임금 법칙을 없애지는 못한다. 우선 임금이 지나치게 하락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작용한다. 만일 자본가들의 탐욕을 일정 수준에서 제어하지 않는다면, 전체로서의 자본가계급은 멸망한다. 가령 먹고 자고 일하는 데 필요한 최소 비용만을 지불하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비용은 지불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개별 자본가는 이 덕분에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자본가계급은 어떻게 될까? 이 경우 노동자가 재생산되지 않으므로 자본가는 더 이상 착취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으로 노동자를 너무 혹사시켜 버린다면, 노동자는 병들고 지치며 진이 다빠져버려 오래지 않아 노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이 경우도, 노동자의 부족 때문에 자본주의는 거대한 위기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는 국가를 동원해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지나친 탐욕”을 제어한다. 최저 임금제나 산업안전법, 국민의료보험, 법정 노동시간제, 산재보험 등이 그것을 위한 수단이다.

 

  다른 한편으로 임금의 지나친 상승을 제어하는 힘이 작동한다. 강성 노동조합 때문에 임금 비용이 과도하게 높아지면 자본가는 직장 폐쇄를 통해 저항한다. 또한 은행가들은 법정 관리 등의 장치로 노동조합을 공격한다.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장치들도 사용된다. 이윤이 심각하게 잠식되면, 자본가는 악랄해진다. 자본가는 노동조합 파업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저항한다. 여기에 국가권력의 경찰력이나 용역깡패 등이 이용된다. 공황이나 기업 도산의 압력도 작용한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임금의 상당 부분을 다시 빼앗긴다. 심지어는 실업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제도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이 저항하여 일정 정도 높은 임금을 강제하면, 자본가는 이 손실을 다른 통로로 메워야 한다. 바로 그것이 비정규직 제도와 중층화된 하청 사슬의 도입이다. 이것들을 통해 자본가는 조직된 정규직 노동조합 때문에 침해받은 이윤을 보충한다. 여기서는 최소한의 임금 수준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규직 노동조합이 모른척 방관한다면, “비정규직 제도 확산과 중소 하청기업 노동자 착취”를 묵인한 대가로 계급 타협이 이뤄진다. 그러나 정규직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입각해 반대한다면, 탈출구가 봉쇄된 대자본은 필사적인 전면 대결에 돌입한다.

 

  현재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전적으로 전자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도 마찬가지다. 해외 다국적 자본, 그리고 국내 대자본 모두 만일 노동자의 임금이 높다면 더 싼 임금의 다른 나라로 자본 투자선을 변경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 투쟁이 활발하여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에서는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것은 곧장 경제 위기와 대량 실업을 부른다. 이것이 두렵다면 선택은 단 하나다: “실업을 피하기 위해 저임금에 만족해야만 한다!”

 

  결국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 자본주의 임금 법칙의 선을 기준으로 단결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약간 더 높은 임금을 따낼 수 있다. 반면 저항할 수 없는 노동자는 더 낮은 임금만을 얻게 된다. 이 두 부분을 종합하면 전체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임금은 임금 법칙에 의해 규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라면, 노동해방을 여는 위대한 투사의 자격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노동해방 투사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노동자계급의 대의를 지키겠다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때뿐이다. 그리고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하여 분노할 줄 알고 저항할 줄 알 때뿐이다. 임금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해방 투사의 자격을 행동으로 쟁취한다.

 

  

임금 투쟁의 원칙

 

  (1) 임금 투쟁의 상한선은 없다. 노동해방 투사들은 임금 투쟁을 단지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제한하지 않는다. 노동해방 투사들은 임금 투쟁을 “노동의 대가 전체”에 해당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하며, 이를 통해 임금 제도의 철폐를 향해 진군한다.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 전체 쟁취를 당장 내걸고 투쟁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투쟁력이 아직 그만큼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다고 노동자의 임금 요구가 형편없이 낮은 수준에 제약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노동조합은 투쟁력이 뒷받침되는 이상, 가장 높은 최고치의 임금 요구안을 내걸고 가차없이 투쟁해야 한다.

 

  (2) 임금 요구안이 자본가의 지불 능력, 정상적인 이윤 획득에 맞춰 조정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노동조합 임금 투쟁은 자본가의 이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되찾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수행해야 한다. 착취자들의 정상적인 이윤에 대해 배려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절대 아니다.

 

불황, 공황기의 이른바 ‘지불 능력’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 “이제껏 우리의 피와 땀을 대가로 먹은 이윤을 토해내라! 또한 이 체제를 작동불능의 엉망징창 상태로 내몬 것은 전적으로 자본가계급이다. 당신들이 벌려놓은 결과를 우리 노동자가 책임질 수는 없다!” 양보교섭을 통한 임금 삭감은 언제 어떤 시기든 절대 용납할 수 없다.

 

 (3) 실업 문제가 대대적으로 확대될 시, 노동조합은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를 확대하자!”는 투쟁을 전면에 배치해야 한다. 한줌 자본가들의 이윤만 고려하지 않으면 이런 해결책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다.

 

  (4) 임금 투쟁은 성과급을 배격하고 기본급 인상 기조로 정확히 맞추어야 한다. 특히 노사협조주의와 연결된 ‘이윤 증대에 따른 특별 성과급’, ‘타결시 타결장려금’ 형태의 성과급은 철폐하고, 기본급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5) 전체 노동자계급의 임금과 관련된, “최저 임금 수준 대폭 인상”, “비정규직 제도 철폐와 동일 노동 동일 임금”과 같은 계급투쟁적 요구를 전진 배치해야 한다.

 

  (6) 임금 투쟁은 노동자를 단결시킨다는 원칙 하에 배치해야 한다. 라인별, 부서별 분열을 낳은 요구들은 가능하면 배제하고, 공통의 요구를 전면에 부각시켜야 한다.

 

  (7) 임금 투쟁과 나란히, 노동해방을 통한 착취의 완전 철폐 필요성을 끊임없이 선전 선동해야 한다. 또한 임금 투쟁만으로는 임금 법칙을 벗어날 수 없음을 모든 방식으로 선전 선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