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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무슨일이

촛불이 만들어가는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9. 11. 24.

 

매주 수요일 저녁에 수원역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 

 

이름 없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


 1. 수원촛불의 시작과 형태


아이를 업은 한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촛불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청계광장에서 청소년들의 촛불이 시작되자, 수원지역에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촛불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원촛불은 아이를 업고 혼자 나와 피켓과 촛불을 들고 서 있던 아기 엄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걷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업었던 이 엄마는 서울까지 갈 수는 없지만 위험한 먹거리로부터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원역 광장에 혼자 나와, 시민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홀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5월 6일 처음으로 수원역 광장에서 촛불집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촛불이 시작된 주는 매일 촛불을 들었고, 그 이후 5월 9일부터는 매주 수요일 한번 씩 촛불을 들기 시작, 현재까지 86차례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와 네티즌이 함께하는 촛불
수원촛불의 장점과 특징은 네티즌과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서 다양하고 지속적인 사회문제를 발언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권단체, 시민단체, 노동조합, 진보정당 등 수원지역 40여개 단체가 네트워크하고 있는 수원시민대책회의의 단체 활동가들과 회원들 뿐 아니라 광우병수원감시단에서 명칭을 바꾼 ‘여기는 수원시민광장(cafe.daum.net/swnomadcow)’의 회원들이 함께 수원촛불을 만들고 있습니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시작된 촛불이지만,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들을 모두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대운하반대 운동 및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한 환경생태 문제, 공공영역 민영화 문제, 일제고사를 비롯한 교육공공성 강화, 용산참사, 비정규직 문제, 민주주의 파괴 등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언론미디어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어느 한 군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촛불을 넘는 다양한 실천
1년을 넘는 동안 한주도 거르지 않고 촛불을 드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수원촛불은 이를 넘어서는 실천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1월부터는 매주 수요일 오전 7시 수원역에서 바른 언론을 알리기 위한 실천을 했고,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일인시위를 수원지역 각 학교 앞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촛불을 넘어서는 고민과 실천을 위해 경제학강좌를 비롯, 경제위기를 넘는 대안사회 강좌 등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체험학습을 자녀들과 함께 떠나거나 MB악법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지역단체들과 함께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탄압받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평택역까지 도보행진을 하거나, 지역의 해고노동자들의 투쟁현장(오산 캐리어, 한일파카유압) 등에 지지방문을 가는 등 연대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이주노동자 탄압과 중증장애인들의 투쟁에도 함께 해 왔습니다.      


탄압에도 주저앉지 않는 고집스러움
1년 넘는 동안 4명의 수원촛불시민이 소환조사를 받았고, 1명의 촛불시민이 구속수사받았습니다.

용산참사 수원촛불로 다시 2명이 소환조사를 받은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수원촛불을 접지 않았고, 오히려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고 벼랑 끝에 몰리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추운 겨울도 더운 여름도 한결같이 고집스러움을 지켰던 이유는 캄캄한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밤을 밝히고 있을 새벽별이 누군가는 꼭 되어야 한다는 의지와 그런 날들을 같이 지켜온 촛불시민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직장인, 주부, 학생, 실직자, 해고노동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종교인
수원촛불은 처음에 수백명이 모였습니다.

서울로 갈 수 없는 일반 시민들 중 청소년이, 대학생이,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는 않습니다. 많을때는 백여명, 적을때는 삼사십명도 모여서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촛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직장인, 주부, 학생, 실직자 들 다양합니다. 그리고 종교인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회원, 그리고 해고된 노동자들도 똑같은 촛불시민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촛불을 드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들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2. 수원촛불의 성과와 한계


수원촛불의 성과와 중요성
우선 수원촛불은
첫째 한국사회 어느 공동체나 개인보다 한결같고 꾸준한 사회적 실천을 묵묵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과를 남기고 있습니다. 중요 이슈가 있으면 활활 타오르다가도 대중들의 관심이 사그러지면 시나브로 접고 마는 한국사회운동의 관행을 되짚어 볼때, 1년을 넘어 2년이 넘도록 묵묵하게 촛불을 지키고 있고 그리고 다양한 실천과 영역을 뛰어넘는 진화를 통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귀감이 됩니다.


두 번째는 .촛불시민들과 지역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연대하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있는 점입니다. 촛불광장이 열렸을 때, 촛불시민들은 시민사회를 불신하고 한국시민사회는 촛불시민들을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원촛불은 단체와 개인들이 서로의 장점을 통해 만나고 단점을 서로 지적하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역시민사회단체만 있었어도, 촛불시민들만 있었어도 결코 일년이 넘는 강고한 실천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후 한국사회운동에 중요한 교훈 점을 남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 번째는 영역을 뛰어넘는 실천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주저없는 연대입니다. 촛불은 어떤 특정한 영역에만 관심이 있다는 관념을 뛰어넘어 수원촛불은 한국사회 모든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영역의 강사들과 길거리 특강도 하고, 문화제나 콘서트, 국악제 등을 해왔습니다. 그런 고민의 중심에는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는 약자들과의 주저함없는 연대감이 있었습니다.


타 지역의 촛불 형태
지금도 각 지역에는 수원촛불과 같은 지역촛불들이 작지만 강하게 결속해서 촛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아주 작게는 열명도 안되는 시민들이, 때로는 수백명 수천명이 모이기도 하면서 촛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끈질기게 실천하는 중입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매일 선전전을 진행하는 강남촛불을 비롯해서, 강동, 송파, 노원, 의정부, 용인, 성남, 부천, 안산 등 수도권지역의 촛불들은 대부분 매주 실천을 빠짐없이 하고 있습니다. 한편 광주나 부산 등의 지방대도시의 촛불은 여전히 규모있는 촛불들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루종일 판넬팀의 경우는 매주 지역들을 돌면서 판넬실천전을 진행중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촛불들이 변화를 통해 진화하면서 꾸준한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촛불에 대한 탄압은 여전히 진행중
촛불로 인해 정권 초반 대운하, 민영화 등 정책 드라이브를 걸지 못한 이명박 정부는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에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광장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집회 시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법제도적 장치와 초법적 폭력을 동원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온라인상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미네르바 구속을 비롯, 다양한 형태의 권리 침해를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무수한 촛불시민이 연행, 구속 되었으며 향후 이러한 공안탄압은 소리소문없이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용산참사, 미디어법, 4대강을 막을 힘이 없다
이러한 정권의 공세적인 탄압으로 인해 촛불을 들고 다시 광장을 만들기 위한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저항은 사실 좌초되고 무기력한 실정입니다. 300일이 넘는 동안 장례조차 치루지 못한 용산참사 현장이 그 증거이며,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위시로 한 언론악법 통과를 위한 저들의 저항을 막지 못한 것도 현실입니다. 대운하의 형식만을 벗어버린 4대강 삽질이 막 시작되려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이것을 실제로 막을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거, 투표밖에 답이 없다?
우리들은 우리가 들고 있는 촛불 몇 개가 세상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무기력에 빠진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선거를 통해서 바꿔야 한다는 기대감이 팽배합니다. 그 와중에 경기도 교육감 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시민사회와 함께 후보단일화 과정을 힘겹게 거친 경기도 교육감 선거가 시민들의 힘으로 승리했고, 각 정당 등 힘의 균형관계로 인해, 논의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는 이명박 정권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촛불시민들은 다수가 이명박과 한나라당만 아니면 된다는 민주대연합 전선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조금 다른 양산이었지만 경기도교육감 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이러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과를 선거로 결론짓고, 특히 반MB단일전선에 몰아준 대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는 평가를 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선거로 모든 것이 귀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것이 국민의 정당한 심판이라고 생각하렵니까, 아니면 반대로 이명박과 한나라당만 아니면 그것이 국민의 정당한 기대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이 지금의 선거판에서 이야기 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내년 지자체 선거가 치러진다면, 역시 우리는 모두 들러리만 서면서 정치꾼들에게 휘둘리고 말지 않을까. 이럴 때 우리는 선거와 촛불은 넘는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지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명박을 당선시켰던 배경을 지나치면 안된다
이 시대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들만이 살아남는 승자 독식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는 사라지고 영리와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만이 남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승자가 되느냐 아니면 패자가 되느냐는 갈림길이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것입니다. 일터만이 아니라 학교까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쟁력있는 이들은 가족이 해체되는 것을 각오하고 기러기 가족이 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이명박이 당선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BBK 의혹이 있음을 아는 국민 대다수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아주고 한나라당을 대거 국회에 입성시켜 준 것은 대한민국의 파이를 키워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정글같은 국제사회에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요구였습니다. 미친 속도를 멈추고 다시금 정상적인 사회로 가자는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것들의 이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권리는 일단 잘살아보자는 허상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승자의 사회로 만들고 싶고, 내 스스로가 그러한 사회에서 승자로 살 수 있을 꺼라는 허황된 망상이 이명박을 당선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명박은 승자의 사회를 철저히 체현한 장사꾼일 뿐이었었습니다. 그는 당신들을 이용할 뿐, 결코 모든 이들과 승자의 세상으로 갈 생각이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과거에도 승리자이고 미래에도 승리자가 될 소수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이명박을 당선시켰던 한국사회가 스스로 성찰하지 못한다면, 이명박을 넘어서는 것은 요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루저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80센티 이하의 남성은 루저”라는 한 여성의 발언으로 촉발되었다는 루저 논쟁과 루저녀에 대한 비난의 저변에는 루저로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의 찌질한 복수심이 깔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럴때 우리는 루저를 양산한 이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하고, 한끼 식사도 못 먹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한 나라에서 백억대 부자가 되는 것만이 선이라고 지껄여대는 부도덕한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촛불은 절대 이명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선거가 아무리 중요한들, 좀더 괜찮은 이명박에게 투표를 하고 대를 물려 충성을 맹세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앞으로의 과제
 
지금까지의 성과와 한계, 성찰의 목록들을 되짚어 좀더 진취적인 과제를 내와야 합니다.

요지는 다시, 촛불과 선거를 넘는 상상력과 실천이 무엇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직장과 학교와 가족과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 무엇이 있겠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멀리서 찾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먼저 답을 찾았으면 합니다.


과제는 길게 적지 못하겠습니다. 여기까지가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촛불 시민들과 함께한 일년 동안 운동이 무엇이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회적 실천이 무엇인지 감동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이름없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 그것은 수원촛불같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가 한발 더 내딛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거대한 폭력 앞에 그래도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대딛을 수 있는 걸음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역에서 길을 묻습니다.


*이글은 지역운동포럼in수원의 공통의제1. 촛불, 지역에서 길을 묻다의 발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