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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 투사와 노동조합운동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6. 9. 30.
노동해방 투사와 노동조합운동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은 주로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노동해방 투사는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 왔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해외좌파의 글을 번역한 아래의 글은 노동해방 투사가 노조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노동해방 투사의 노조활동 원칙과 구체적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이 글은 맑스, 레닌, 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을 일관되게 계승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쇠퇴와 노조관료제화가 더 진전된 현대자본주의 사회에 걸맞게 한 단계 더 구체화하고 있다. 이 글이 노동해방 투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하게 세우면서 노조활동을 더욱더 역동적으로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도구로서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 개량주의 지도부가 장악하고 있는 전통적 노조들은 낡아빠진 조직형식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노동해방 투사들이 관심을 가진 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지난 50년간 초좌익 경향은 떠들어댔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은 노동자투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역할이 긍정적인가 혹은 부정적인가는 여기에서 핵심이 아니다.


  노동자계급 운동은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의 주도 없이도 정말 수많은 투쟁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것이다. 때로는 그런 투쟁들이 노동조합의 공공연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노조 지도부의 통제력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파업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조합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 노조가 투쟁에 반대하는 반면 노동자들은 투쟁을 원할 때, 노조 지도부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핑계로 투쟁을 시작하고 추진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명백히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대한 배신이다. 오히려 노동해방 투사들은 그러한 경우에 운동을 밀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노동자들에게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투쟁이 전통적 노조들이 지도하는 가운데 전개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모든 나라들에서 노동해방운동은 노동자계급 가운데 극소수인 반면, 이런 노조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많은 이점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노동해방 투사들은 전략을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전통적 노조 안의 개량주의는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당면 이익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쇠퇴하는 제국주의라는 경제적 상황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익을 방어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방어를 포기할 때, 실제로 자주 당면 이익의 일부조차도 방어하지 못하게 된다. 부유한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허약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더욱 그러하며, 특히 저개발 국가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20세기 첫 십년 동안 전통적 노조의 개량주의적 성격은 그들 투사와 지도부의 대부분을 노동귀족들 가운데에서 모집했다는 점에 주로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평화적으로 조절하고자 갈망하던 그런 노동귀족층의 심리를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 개량주의는 아주 사소한 개량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사회적 기초는 어느 정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 점이 분명하다. 제국주의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쇠퇴는 노동조합기구를 자본가국가에 협력시키는 방향으로 밀어붙여 왔다. 한편 국가는 노동자계급 속으로 자신의 정책을 전달하는 벨트로 노조를 바꾸어버리려고 계속 시도해 왔다.

 

이와 같은 상황이 자본가국가에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고용되어 안정적 자리와 합법적 편의를 제공받는 관료기구를 성장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노조가 더 깊이 국가 속으로 통합되어 가면서 등장한 관료기구는 (20세기 초반까지는 개량주의 노조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노동자민주주의, 노동조합민주주의와 완전히 모순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전통적 노조들은 모순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 노조들은 국가와 자본가 앞에서 노동자계급을 방어하는 체 한다. 따라서 그들은 어쨌든 여전히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킨다. 하지만 변호사가 자기 고객의 이익을 지키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지킬 뿐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이익이 고객의 이익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존재가 자본주의 사회의 존재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노조들은 노동자계급 속에서 자본가들의 전반적 이익을 단순히 대변할 뿐이다.


우리는 왜 노동조합 안에서 활동하는가?

전통적 노조들은 대개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최고의 버팀목이다. 우리는 전투적인 조합원들이 평소에는 노동자계급에 헌신적이지만 자기 지도자들에게 속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투사들의 일부는 자신의 배경, 생각, 그리고 때때로 개인적 이해에 맞는 노조 정책에 기초해 모집되지만, 그런 부분이 노조 투사의 다수는 아니다.


  어쩌면 정직한 노조 투사들은 대개 소부르주아적 심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에서 그들은 노동자계급 대중과 다르지 않다. 사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선봉일 뿐이다. 그들을 자기 입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동해방 투사들이 분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분투하면서 노동해방 투사들은 혁명적 사상이 올바르고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조 투사들과 함께 일상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런 행동을 바탕으로 대중을 납득시킬 수 있을 때, 노동해방 투사들은 세계혁명에 관해 수많은 말을 쏟아내면서도 나날의 투쟁에 따르는 책임과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잡담꾼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노동해방 투사들이 노동자계급의 최상 분자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만 노조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해방 정치 활동이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부위에 한정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조직된 부위는 전국, 지방, 현장 차원에서 어느 정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언제나 [노동자계급 전체에서] 소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자계급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노동해방 투사들의 노조 활동은 노조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노동자들을 포함해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층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 전체의 이해를 방어하지 못하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노동자계급은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계급이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항상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역사적 가능성, 그리고 자신의 힘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그렇게 높은 의식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혁명적 위기처럼 드문 역사적 시기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혁명은 이미 오래 전에 성공했을 것이다.

 

결국 격변의 시기와는 동떨어진 대부분의 시기 동안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본가 이데올로기와 노동자계급 운동 속의 그 대변자인 개량주의자들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관료주의 활동, 정책, 주장들은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노조관료들은 이 점에서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의 정책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가장 후진층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안다.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은 여전히 주로 전통적 노동조합의 수로를 통해서 표현된다. 이제 노조 안에서 활동하는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자들이 경험을 통해 의식수준을 높일 수 있게 하고, 자기 힘에 대한 자신감을 점차 키울 수 있게 하려면, 자신의 전투성을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재빠르게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노동조합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이런 진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노조관료들이 아니라 노동해방 투사들의 사상, 행동, 태도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진실로 대변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공간이 된다.


  게다가 노조활동은 노동해방 투사들을 훈련시키는 훌륭한 학교다. 그들은 대중의 실제적인 편견, 열망, 문제, 생각을 더 잘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해방운동 전반이 불행하게도 노동자계급보다 소부르주아 계급에 더 강한 뿌리를 두어, 소부르주아 노동해방 투사들이 노동자투사들에게 영향을 받기보다 노동자투사들이 소부르주아 심리에 더 자주 영향을 받는 경우에는 특히 더 중요하다. 노동해방 조직들이 노동자계급을 자기 머릿속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사실 이 조직들은 실제 노동자계급의 현실적 의식수준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한 그들 자신의 환상적 관념에 기초해 정치노선을 결정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노조 속에서 투사가 활동하는 것은 긍정적 성과를 얼마나 얻을 수 있는가에 관계없이 확실히 유익하다.


  이름값을 하는 노동해방 조직, 즉 그 구성원들의 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노동해방 조직은 노조 활동이 구성원을 선발하는 시험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잘 이해한다. 이것은 심지어 개량주의 활동가나 스탈린주의 활동가도 감수하는 위험을 조금도 감당해내지 못하는 수다쟁이 비평가들과 진짜 투사들을 노동해방 조직이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한편, 이것은 또한 노동해방운동에서도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초보관료와 정직한 투사들을 분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종종 현장 노동해방 투사들에게 공개적인 유일한 대중 활동이자 모든 노동자들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활동인 노조 활동은 성과가 얼마나 있느냐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노동해방 조직과 투사들에게 정신적으로 필수적인 활동이다.


  이런 모든 이유들 때문에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활동으로 간주해야 한다. 하지만 이 활동은 노동해방 투사들의 전체 활동 중 일부이며, 활동의 한 수단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동해방 노동자 투사들은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 조직의 기본 형태이기 때문에 강화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사들의 목적은 노동자계급 전체를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투사들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방어하는 것 말고 다른 이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조합에서 최고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노조만으로는 노동자계급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협소하게 노조 활동을 바라보지 않는다. 투사들은 정치 활동과 노조 활동 사이에 칸막이를 쳐서 서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투사들은 자기 노조를 지지하는 경우에도 다른 관료에 반대해서 어떤 관료를 옹호하거나, 그들과 편한 관계를 맺기 위해 아첨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노조 안에서 활동하는 노동해방 투사들은 자신들이 참여하는 다른 활동은 물론 노조 활동을 통해 최대한 많은 노동자들을 자신의 사상, 노동해방 강령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투사들이다.


노조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노조 활동이란 조직되어 있건 그렇지 않건 모든 노동자들을 상대로 선동하고, 그들의 일상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노조 내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대개 노조 활동을 하는 노동해방 조직을 괴롭히는 첫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어떻게 평조합원 활동에서 빨리 벗어나 노조 상층 체계(노조 대의원대회, 지역본부, 총연맹)에 개입하고 더 중요한 책임을 맡을 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노동해방 투사들과 노조관료들의 실제 세력관계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물론 노동해방 투사들이 노조 안에서 더 큰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자리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그들이 어느 정도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을 때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더 힘 있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노조 체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것은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이다.

 

최선의 경우에도, 그런 투사는 다가올 투쟁의 결정적 계기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으며 노조 공식 활동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말 환상인데, 왜냐하면 노조관료들이 반드시 필요한 대책을 취함에 따라 그런 개입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에는(불행하지만 이런 경우가 더 많은데), 투사가 노조관료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든가 아니면 공범이 되고 심지어는 노조관료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노조 지도부를 새롭게 떠맡는 것은 노조관료들이 잘못(자신들의 관점에서)했을 때가 아니라 평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원할 때만 의미를 지닌다. 오직 그때에만 조합원들은 투사와 관료들 사이의 대립에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의지를 노조관료들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개입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프랑스에서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단위사업장과 산별노조의 지부에만 해당된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상급단체에는 오직 노조관료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조 대의원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노조를 떠맡는 것과] 똑같은 문제와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투사의 활동 가운데 보조적인 측면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노조관료들이 노조를 완전히 좌지우지하고, 노조 안에 민주주의가 거의 실종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자민주주의, 노조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중심축으로 삼아 왔다.


  이것의 가장 정확한 사례는 프랑스, 특히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노총인 노동총동맹(CGT) 내 활동이다. 그곳에서는 조합원들이 노조 정책에 영향을 미칠 힘이 박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노조 회의에 참석할 수조차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조합원이라는 것은 그들이 조합원증을 갖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다른 나라와 다른 노조들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예외가 별로 없다. 오히려 이런 현상은 어느 정도 일반적이며, 우리 시대의 노조의 역할로부터, 노조가 국가기구에 통합되고, 노조관료들이 노동자들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 한다는 점으로부터 도출된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해방 투사들이 장기적이고 꾸준한 작업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 20세기 초반의 노조민주주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노조 안에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에 개량주의 관료들에 맞선 노동해방 투사들의 투쟁은 그들의 영향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들어가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이 점 때문에 관료들이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의식 발전은 점진적 발전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노동자계급 민주주의, 노조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때 노동해방 투사들은 민주주의를 실제로 원상 복구하여 노동자들이 자기 조직을 자기 손에 쥐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것은 혁명적 시기에나 나타날 것인데(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자 승리의 필수조건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것은 노동자 승리의 결과로 나올 것이다. 오히려 노동해방 투사들의 목표는 왜 노조관료들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무관한지, 왜 노동자들은 노조 서기들을 신뢰해서는 안 되는지, 왜 그들은 노동자조직 안에서 활동적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노동해방 투사들의 정책만이 노동자계급의 단기적, 장기적 이해와 일치하는 유일한 것인지를 노동자들에게 이해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노동자계급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요성은 그런 민주주의가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용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점에 있다.


  사실 노조관료들은 평조합원들이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자기 정책을 유지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평조합원 통제를 피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노조관료에 맞서 싸우는 첫 번째 방법은 자기 견해를 만들려고 하고, 그것을 표현하려 하고 결국은 자기 결정을 내리려는 보다 능동적인 평조합원들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노동자모임이 열리게 만들고 그것을 모든 조합원들에게 더 나아가서는 가능한 한 비조합원들에게도 공개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평조합원들이 그런 모임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자신들의 문제를 정기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회합을 더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오로지 노동해방 투사들만이 노조관료에 대한 반대를 조직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활동방식이다. 하지만 노조관료의 억압은 (주로 노동총동맹에서 나타나지만 이른바 더 민주적인 연맹에서도 나타나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노조 안에서 순수한 형태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곧바로 축출당하고 모든 노조 활동이 가로막힐 수 있다. 하지만 노동해방 투사들이 떠맡아야 할 임무의 기본성격은 노동해방 투사와 노조관료들 사이의 세력관계가, 즉 노동해방 투사들이 그 안에서 활동해야 하는 객관적 조건이 결정한다. 지금 당장은 [위에서 말한 노동해방 투사의 활동방법 외에] 다른 방식의 활동이 가능하지 않다. 공허한 말싸움, 빈약한 선동 그리고 노조관료체계에 편입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더 나아가,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조관료에 맞선 투쟁에서 어떤 거대한 그리고 영구적인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비록 특정한 공장, 특정한 사례에서는 세력관계가 노동해방 투사에게 유리할지라도, 대결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전국적인 세력관계에 좌우되는데 그것은 곧바로 노조관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법률들은 일반적으로 노조관료들을 모든 형태의 평조합원들의 통제로부터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 노조관료들과의 대립은 대체로 그들의 승리로 끝나며, 그 결과 일부 노동자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투쟁을 통해서 노조관료제가 진짜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투사들은 단단해질 수 있고, 경험이 풍부해질 수 있으며, 투사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노조활동에서 노동해방 조직의 임무

따라서 노동해방 투사는 항상 노조관료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굴복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노조 안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임무이다.


  노조 투사들은 또한 자기 자신의 조급함이라는 또 다른 압력과도 싸워야 한다. 그것은 때때로 노조관료의 조급함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시기상조의 투쟁을 낳을 수 있다. 현 상황에서는 그런 것이 자주 노조활동 전부를 포기하는 핑계를 찾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게다가 다른 노동자들은 그/그녀가 왜 투사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된 노조 안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조건에서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 맞는 구체적 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은 노조 안에서 고립된 투사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노동해방 조직은 노조활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같이 논의하고 통제하면서 최선을 다해 투사를 지원해야 한다.


  노조 안에서 활동하는 노동해방 투사를 절대 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대신 그/그녀는 조직의 명확하며 용의주도한 정책, 전술, 전략을 노조 영역에 적용하는, 특정한 조직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신의 책임을 잘 알고 있는 조직을, 다른 한편으로 그런 조직을 신뢰하는 단련된 투사를 필요로 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노조 안의 혁명적 활동이란 있을 수 없다. 가장 나은 경우일지라도, 우리는 단지 스스로 노동해방 투사라고 말하고 또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조 좌파들 수준의 활동만을 하고 있는 투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여기에 가장 적합한 사례를 볼 수 있다. 통일사회당 지도부는 노조관료들에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주의 깊게 취한다. 그런 통일사회당은 자기 활동가들에게 정해진 당 방침을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조 안에 프랙션이나 활동가 팀을 만들 권리를 부정한다(비록 통일사회당 안에서는 그런 권리가 인정되고 있지만). 그 결과 수많은 노조운동 세력들이 참여하는 통일사회당이 노조를 통해 현장의 계급투쟁에 개입하지 않는 조직이 되어버린 것도 당연하다.


  물론 통일사회당은 노동해방 조직이라기보다 사민주의 좌파정당에 가깝다. 하지만 똑같은 정책에 따르는 위험이 노동해방 조직들 앞에 기다리고 있다. 조합주의 좌파들을 진실한 노동해방 투사들로 바꾸기 위해 조합주의 좌파정책을 개조하는 것보다는 정말 조합주의 좌파에 순응해버리는 것이 더 쉽다. 그런 조직 영역의 기회주의는 정치 영역의 기회주의만큼이나 해롭다는 것이 노동자운동의 역사 전체를 통해 증명돼왔다. 이런 방식으로는 오래도록 지속적인 조직은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적어도 혁명적인 조직은 절대 만들 수 없다.(197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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