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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노동인가?

by 수어통역사 박정근 2006. 8. 28.
 

무엇을 위한 노동인가?


 노동(생산)의 3중적 성격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생산은 그 본질에 있어 교환을 위한 생산이요,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생산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노동이 완전히 자본의 이윤만을 위한 것이라며 노동자들은 생산을 거부할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이라고 해도 개인적 생존을 위한 생산과 동시에 사회를 위한 생산, 구체적으로는 구매자인 소비자를 위한 노동이라는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무엇을 위해 생산하고 노동하는가의 각 측면에 따라서 노동의 목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 그에 대한 저항의 목적도 다르게 드러난다.

 

 첫째로 자본의 이익, 회사의 이익을 위한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 ‘생산성의 향상’ 따위는 곧 자본의 이익증대이다.

 

 둘째로 노동자의 생계, 나를 위한 생산과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벌기위해 노력한다. 이는 자발적 잔업특근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셋째로 사회를 위한 생산은 구체적으로 내가 생산하는 생산물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소비자를 위한 생산이라는 측면이다. 이 경우 생산성 향상은 더 좋은 자동차를 생산한다든지 혹은 더 좋은 질 좋은 써비스를 제공함으로서 구매자이자 소비자들의 만족을 높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인 한 노동자의 노동은 항상적으로 자본의 이윤을 위한 목적에 동원되는 측면이 가장 주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작용하는 외적조건들에 따라서 때로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착취, 때로는 나를 위한 생산이라는 사적측면이 크게 부각되기도 한다.


 80년대 말의 노동자 투쟁과 반응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생산이라는 측면만을 본다면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노동을 거부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이다. 나와 사회를 위해 남는 것이 없는 짓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70년대 이래로 노동자가 오직 자본의 이익을 위한 노동기계로서 동원되어온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사회전체는 이에 대해 모두 공유하는 상황에서 87년 대투쟁은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장시간, 저임금, 고강도 노동 속에서 노동 3권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세월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항쟁의 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산업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 투쟁이었기에 파업은 일부 독재언론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은 이를 배경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 동안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기 보다는 철저히 노동자들의 권리가 무시되는 상황에서 오직 국가의 노동력 동원이라는 목표와 자본의 이윤창출이라는 목표만이 중요하게 작용하였고 이에 반발한 투쟁은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소비문화 시대

  97년 이후 구조조정을 거친 후 2000년대에 상황은 완전히 변하였다. 자본의 이윤창출과 노동자 개인의 생존과 욕구의 충족이라는 노동의 사적성격은 훨씬 더 강화된다.

 첫째로 시장원리가 강화됨으로서 자본의 이윤논리가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고 공공부문도 공공성을 대신하여 이윤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공기업도 늘 실적평가를 하고 공기업들의 노동자들에게도 성과에 따른 차등성과급을 강화한다.

 

둘째로 경제위기시대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만성적 고용불안의 시대’에 접어들자 노동자들의 사고방식에서도 노동의 사적성격이 강화된다. 내 고용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또 언제 짤릴지 모르니 지금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셋째로 ‘소비문화의 시대’라는 시대흐름은 ‘더 많은 소비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한다.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인상 투쟁도 중요하고 잔업특근을 하나라도 더 하려 한다. 심지어 가족마저 더 많은 특근을 통한 더 많은 임금을 벌어 올 것을 요구한다.

 

 노동의 사적 성격이 강화된 상황에서 ‘노동을 거부할 권리’(=파업권)도 사적이익을 위해 사용된다. 대부분의 파업투쟁은 노동조합원의 임금과 후생복지를 위한 투쟁이다. 물론 정치총파업을 자주 하지만 실질적으로 힘 있는 파업을 전개해본 경우는 드물다. 조직된 정규직의 파업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구조와 결합하면서 더욱더 ‘사적이익’을 위한 성격을 강화한다.

 

 첫째로 과거에는 대공장 정규직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를 위한 투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양산 등 더욱더 중층적으로 위계화 되는 사회구조로 인해 더 이상 과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조직된 대공장들의 파업이 전체 노동자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이른바 ‘낙수효과(물방울 떨어뜨리기=trickle down)’는 현재 상황에서 발휘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투쟁 = 보편적 이익을 위한 투쟁’이라는 등식은 사라지고 있다.

 

 둘째로 상황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 =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투쟁’이라는 등식보다 더 악화된다. 대규모 공장과 회사들의 담장 안에서 자본과 정규직 노동자가 서로의 이익을 주고받음으로서 탄생하는 것이 이른바 ‘담합적 노사관계’다. 노조의 비리 또한 이런 문제들이 드러나는 사례인 것이다.

 

 셋째로 조직된 노동자와 비정규직의 분할은 물론 노동자와 소비자는 분리된다. 이는 곧 노동자와 국민의 분리이다. 이 순간 자본은 국민의 이름을 빌어 노동조합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파업을 할 수 있는 조직된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 조합원집단의 이익투쟁 ≠ 보편적 투쟁’인 상황에서 “파업으로 경제가 망한다.”  “배부른 노동자들의 이기적 파업” 등의 자본과 언론의 공격이 먹힌다. 파업을 할수록 지지가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는 것이다.  현대차가 파업하면 그 시기에 만든 차는 사려고 하지 않고 욕을 한다. 철도가 파업하면 승객들은 짜증낸다. 간호사들이 파업하면 생명을 볼모로 하는 파업이라고 난리다.  이런 경우에는 공공적 성격을 가진 노동이 해당부문의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중단되고 거꾸로 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적인 노동이 사회화되는 모습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이 거꾸로 사적인 노동으로 역전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현실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면서 시민의 안전을 위한 파업이고 사회적으로 고용안정과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니들 이익을 위한 파업’으로 낙인 찍힌다. 솔직히 조합원들의 상당수는 사회공공성을 위한 몇 가지 구호를 내거는 것도 파업의 정당성을 포장하기 위한 전술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제 모든 파업이 정당하게 평가되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 파업인가에 따라 정당성이 결정된다.

 

 

자본주의자가 된 노동자?

 민주노조가 출범하기까지의 노동자 투쟁은 그것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구호로 출발한 투쟁이라고 할지라도 ‘평등사회’로 표현되든 혹은 ‘혁명’으로 표현되든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 넘고자하는 열망들이 함께한 투쟁이었다. 지금의 상당수의 노조활동가나 간부들 또한 그러한 이념과 전망을 가진 활동가들 이었다.

 

 그러나 많은 지적들이 보여 주듯이 조직된 정규직 노조들에서 만연하는 것은 실리주의다. 실리주의란 곧 더 많은 임금을 핵심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80년대의 노동운동이 사회주의나 혁명을 지향함으로서 자본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2000년대의 노동조합운동이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온 것임을 보여 준다. 조직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화폐량(=임금량)으로 측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모든 것을 화폐량으로 보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제 갓 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비정규직이나 영세사업장의 투쟁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규직 대공장의 임투는 더 이상 ‘노동자의 학교’가 아니라 ‘자본주의 학교’가 되고 있다. 얼마를 더 받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첫 번째 잠정합의가 부결되면 기껏 몇 푼을 더 얹어 가결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공장의 임금투쟁을 변호 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긴급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의도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을 자본에 맞서는 계급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한 자본주의자로 훈육하는데 기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작업장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본주의자로 더 철저히 훈육시키고 있다. 더 많은 화폐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부추겨 이제 노동자들 내부에서도 자연스럽게 주식투자, 땅투자, 주택투자 등을 통해 재테크를 고민한다. 이런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계획 없이 ‘사회주의’니 ‘변혁’이니 하는 것은 모두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새 조직된 노동자들이 ‘삶의 가치’를 ‘화폐의 소유량’으로 생각하는 한 그들은 ‘우리(노동자)가 아닌 남(자본가)’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삶의 기준’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기 위한 사상투쟁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이 ‘말’과 ‘글’로 싸우는 투쟁일까? 그것은 아니다. 새로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구체적 실천이야 말로 사상투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오지 않은 미래

 노동자가 투쟁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생산-유통-소비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 '노동자의 노동=사회를 위한 노동'의 등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제거하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파업 전술도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전투성 = 사회적 고립이라는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왜 이런가? ‘사적 노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노동권’ 마져도 ‘사적으로 활용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계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동자들의 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전환 시킬 것인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의 욕구와 소비자(사회)를 위한 생산의 성격이 통일된 역사는 거의 없다.

 70년대의 경제개발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이름 붙여진 ‘수출역군’ ‘산업역군’이나 ‘조국근대화의 기수’ 따위의 구호들은 군사독재정권의 노동력 동원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이는 노동이 노동자 개인의 욕구실현을 위한 요소가 제거된 상황에서 국가동원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90년 중반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국민파)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는 한편에서 보면 노동과 국민의 통일을 위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국민 속에 계급성을 제거하는 노선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국민파로 알려진 지도부의 정리해고 합의에 대한 반발, 뒤이은 경제위기속에서 정규직 조직된 노동자 마져도 공격받는 상황에서 진행된 치열한 투쟁의 와중에 비판받고 약화되었다. 

 

 노동이 갖는 3중의 측면에 대한 치밀한 고민 없이 갈 경우 자칫 노동의 사회적 측면(소비자를 위한 측면)만을   일면적으로 볼 수 있다. 더 극단적인 경우에 노동자는 더 많은 일을 해서 더 많은 사회적 기여를 해야 한다는 왜곡으로 나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공공성 강화’ 등을 외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노동의 성격 중 무엇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사회공공성 강화’도  근본적으로 발상 자체의 전환이 없다면 그 또한 공염불이 될 것이다.

  

‘다른 삶의 가치’를 위한 노력들

 

 노동운동 혹은 노동조합운동이 낡고 후퇴하고 있으나  ‘화폐량 = 교환가치’만이 유일한 척도인 세상에서 다른 삶의 가치를 위한 투쟁들은 계속 시도되고 있다.

 자신의 삶을 개인적 이익이 아닌 사회자체를 바꾸는데 전부 투자하는 젊은 활동가들도 비록 소수일지라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비록 노동조합의 전체 사업으로 정착하지 못했으나 부단히 ‘사회공공성’을 위한 작은 노력들에 시간을 투자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돈’이 아닌 ‘몸’을 화두로 삼으며 근골격계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동강도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한 노력들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비록 전면화 되지는 못하고 있으나 근대적 공장과 그 안에서 임금을 먹고 ‘사육되는 삶의 패턴’을 전환시키기 위한 ‘텃밭가꾸기’와 같은 소박한 노력도 논의되고 실행되곤 한다. 이는 더 확장되어 ‘돈’이 아닌 ‘몸’과 ‘삶’ 그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운동재편의 불씨로 타 올라야 한다.

 

 ‘타인이나 환경 = 내 생존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반대하면서 ‘타인과 자연환경 = 내 생존의 본질’이요 내 생존 자체로 여기면서 ‘개량적 실천’이라는 욕을 먹는다고 해도 소박한 나눔을 전개하는 노력들도 있다. 당장의 개발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버리고 환경과 생태를 중심으로 한 투쟁들도 전개되고 있으며 오직 자본의 더 많은 이윤을 위해 필요한 인력양성에 맞서는 대안교육에 대한 시도들도 전개되고 있다.

 수요연대의 날, 빈곤체험 등 그것이 비록 거대한 계급투쟁 그 자체와 비교될 수 없을지라도 삶의 가치를 바꾸기 위한 노력은 시도되곤 한다. 이주노동자들을 천대하는 왜곡된 ‘백의민족’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를 넘어서 최악의 노동조건에 놓인 이주노동자과 함께하는 훌륭한 활동가들이 움직이고 있다.

 

 가진 자들이 수채의 집을 가지고 이윤을 찾아 투기를 하고, 비록 재산증식의 의미보다는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수준에서 더 넓은 아파트를 향해 빚을 내고 다시 그 빚을 갚기 위해 자본의 노예로서 노동기계로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주거권 자체를 박탈당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주거권 운동도 있다. 이런 운동은 집 없는 사람들의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인가’하는 새로운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향한 선동과 교육보다 ‘다른 삶의 가치’를 실천하고 이를 운동으로 확산하려는 노력이 덜 중요하다고 얘기할 어떤 근거도 없어 보인다.  

  

 파업개념의 완전한 뒤집기.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의 노동력이 자본의 이윤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측면만을 놓고 볼 때 파업은 ‘자본을 위해 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파업을 통해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니들의 이윤은 없다.’ ‘니들이 만든 자본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저항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저항은 출발일 뿐이다. 다른 대안세계를 보여 주지 못한다. 수동적 파업은 노동이 어떻게 쓰여 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노동권의 활용은 ‘일손을 놓는 파업’이 아니라 공세적으로 우리의 노동이 어떻게 자본의 사적 이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쓰여 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철도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지하철을 멈추게 하는 방식 → 교통불편 → 시민불만 → 파업의 고립으로 나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 악순환은 공공부문의 공공적 노동이 노동자들의 사적이익을 위해 중단되는 것이다.

 

 파업을 하면 오히려 열차나 지하철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운행되지만 노동자가 운영을 장악하여 돈 내지 않고 승차할 수 있게 함으로서 시민의 부담을 없애고, 자본이 배치한 업무를 박차고 노동자들이 혼잡한 역사에 나와 시민들이 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안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철도나 지하철이라는 공공교통을 국민전체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원과 같은 곳에서도 파업을 할 경우 진료중단이 아닌 무상진료를 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상당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다면 병원자체를 노동자가 접수하여 무료진료를 함으로서 무상의료를 일시적으로 제공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의사의 협조 없이는 수술과 치료는 불가능할 것이지만 간호사를 포함하여 병원노동자들은 최소한의 병원 업무를 무료로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을 장악하는 것이 힘들거나 특수한 경우들에는 병원노동자들이 일손을 중단하고 병원 외부에서 (진보적 의사들의 협조가 있다면 더 많은)무료진료사업을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상의료는 제도의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하고 그 이전에는 불가능한 구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병원노동자의 파업시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제조업의 경우, 자동차노조들도 부분적이나마 이런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정비노동자들의 경우 파업을 하고 일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상정비를 한 사례가 있다. 더 많은 방법들이 창안되어야 하겠지만 자동차공장의 경우도 파업을 하면 일을 중단하거나 일에 대한 집중이 떨어져 나쁜 품질의 자동차를 만들어 낸다는 소비자들의 인식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 파업을 할 때 더 많은 횟수의 품질 검사나 통상적인 생산보다 몇 배 느리지만 더 꼼꼼한 손질을 통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공장을 노동자가 접수하여 노동자스스로의 방식으로 더 적게, 더 쉽게, 더 안전하게 일하면서 ‘더 좋은 제품만들기’를 하는 것이다. ‘파업시기 생산된 자동차는 사지 않는다’는 인식을 ‘파업하는 시기에 생산된 차를 선호한다’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파업이 오히려 소비자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노조의 사회적 지지는 확장될 것이다.

 

 공공부분이든 사적 영역에서든 이런 방식으로 수세적으로 일을 중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본이나 공공기업의 이익과 무관한 느리나 더 좋은 제품의 제공, 무상공공서비스 제공과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을까? 파업이 생산의 중단이 아니라 자주관리, 자율생산, 사회적 생산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적극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운동의 사적성격의 강화 

 분할

 노동자 자체가 분할되고 있다. 정규-비정규라는 고용형태, 대공장-중소공장이라는 규모의 차이, 본국인-이주노동자라는 국적의 차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 등 노동 분할된다는 것은 계급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을 넘어서는 계급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운동도 분할되어 있다.

 

 첫째로 앞서 지적한  ‘생산자(노동자) ↔ 소비자(국민)’이 분할되고 있다. 이 분할은 현재에는 노동운동에 대한 ‘집단이기주의’ 따위의 공격에 멈추고 있지만 상황의 변화에 따라 파시즘과 같은 극우정치로 확장될 씨앗이다. 

 

 둘째로 공간적 분할이자 동시에 지향에서의 분할은 ‘현장주의 ↔ 국민주의’ ‘현장운동 ↔사회운동’이라는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생산 현장에만 파 묻혀 있지 말고 재생산의 정치를 하자” 고 말하면 “생산현장도 개판인데 뭔 재생산의 영역이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공장안, 노조안에 머물지 말고 사회적 운동을 해야한다” 고 하면 “현장에 기초도 없이 사회운동을 하라니 어렵다”고 한다. 공장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공장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어떤 공간을 중심에 둘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튀어 나오곤 한다.

 

 셋째로 조직문제에서 본다면 노동조합조직노선을 둘러싸고도 ‘현장조직력 강화 ↔ 초기업적 대응강화(산별노조)’라는 대립이 나타난다. ‘계급적 현장활동의 강화 ↔ 대리적 민주노동당 정치’로 대립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것에 중심을 둘 것인가에 따라서 이는 곧 시간적 분할로 나타난다.  심지어 시간적 분할은 중층적이다. 조합원들은 잔업특근을 비롯하여 더욱더 많은 시간을 노동의 기계로 보내고, 활동가들의 일부는 현장 속에서 기반을 닦으려 시간을 보내지만 또 다른 일부는 정치를 향해 밖으로 향한다.

 

 넷째로 물질적 분할도 뚜렷하다. 고용형태와 기업규모 등에 따른 임금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분할이 내용적 기반이 튼튼한 분화라면 발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분할이다.


 사유

 

 운동은 분할에 멈추고 있지 않다. 더욱 왜곡되어 사유화로 치닫고 있다. 아니 거꾸로 사적 소유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분할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자본의 사적 소유의 확대를 위한 욕망이 강화 될수록 조직된 노동자의 반발에 대해서는 제한된 권리와 돈으로 달래고 비정규직을 늘려서 고용형태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이주노동자를 끌어들여 제일 밑바닥에 깔고 앉는다.

 

 그것은 비단 자본의 사적 소유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느새 자본의 사적 소유의 욕망이 노동자 속에 스며들어 ‘노동을 사적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고 분할된 운동의 각 영역들은 소유의 대상으로 떨어지게 된다. 운동의 분할과 노동의 사적성격이 결합하면서 운동의 몰락은 훨씬 빠르게 진전된다.

 

 노조간부가 직위를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는 비리가 그것이고 자신의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에 국한된 노동조합의 활동이 그것이다. 현장조직이 현장의 실리화와 분할, 사유화를 넘어서는 근본적 비판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노조권력을 위한 파벌로 전락하고 있다. 노조의 상층은 전국적 정파들의 권력게임을 위한 정치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출범한지 얼마되지 않아 벼락부자처럼 국회의원을 내고 이제는 전국적 수준의 정파들의 더 복합적인 권력게임의 장으로서 성격이 왜곡될 위험에 놓여 있다. 단위노조, 상급노조, 정당운동을 비롯하여 모든 공간에서 정보는 파벌내부에서 공유되고 가공되고 왜곡될 뿐, 그것을 넘어 대중조직과 세상의 밝은 빛을 받지 못한 채 더 빠르게 운동의 사유화로 빠뜨리고 있다.  


통합과 공유를 위하여

 분할에 맞선 통합은 어떻게 가능할까?

 앞서 지적한 생산자(노동자)-소비자(국민)의 통일을 위해서는 파업의 방식을 비롯한 새로운 고민들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뚜렷한 분할과 갈등을 보이는 정규직과 사내하청의 문제를 보자. 우리는 양극단의 견해를 발견한다. 하나는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하여 내 일과 같이 연대하라고 하는 당위적 강요의 모습니다. 다른 극단에서는 정규직의 입장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입장의 차이가 뚜렷하고 해결이 안되면 결국은 뭘까? 힘으로 해결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노조를 누르거나 아니면 소수의 사례지만 그나마 공장의 라인을 끊을 힘을 가진 비정규직은 독자회생의 길을 어렵게 가곤 한다.

 

 이런 문제를 보는데 있어서 우리가 가장 우선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다르다는 차이다. 그러나 차이에 머물고자 한다면 연대란 없다. 소부르주아적인 개성의 존중 따위와 같은 취지에서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연대를 위한 출발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차이와 연대’의 철학은 분할된 노동자의 통일을 위한 철학이자 조직운동의 철학이어야 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전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것은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는 동일성을 전제한다면 결론은 획일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문제를 자기문제처럼 생각하도록 강요하거나 혹은 비정규직 정규직의 요구에 따르거나 하는 획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차이와 연대’의 원리에 따라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위하여 다층의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내용과 지향에서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돈의 노예(화폐량의 가치기준)에서 ‘몸과 삶’의 재편을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건강권투쟁과 주간연속2교대제 투쟁에서 그런 성격을 강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비정규직 또한 ‘정규직 노조따라잡기’의 방향이 아닌 ‘삶의 공유’를 위한 새로운 접근의 방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도 차별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단기적 투쟁(상대가 보기에는 돌발적 투쟁)을 놓고 갈등과 연대를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전략적 계획에 근거한 단계적 목표에 대한 통일행동을 강화하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정규직 내부에서 현장과 산업, 사회적 요구는 어떻게 통일 될 수 있을까?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개입 - 사회공공성 강화’ 등의 영역이 어떻게 통일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간략히만 지적한다면 ‘더 적게-더 안전하게 -더 쉽게’를 향한 작업장혁신 노력은 주간연속2교대제 등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장 혁신은 현재의 ‘장시간 노동 - 비정규사용을 통한 저임금 - 비용절감에 기초한 가격경쟁력’이라는 자본의 산업정책을 바꾸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다. 이는 전 사회적으로 볼 때에 고용안정성과 임금 노동조건 등 모든 방면에서 더 좋은 조건에 있는 대공장의 일자리를 정규직이 독점하고 있는 ‘일자리 독점’을 해소함으로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한 고용안정‘을 이루는 사회적 목표와 일치하는 문제다.

 

 정규직 내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생산과 소비 등 각 영역에서 다양한 연대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동자들의 통일을 위해서는 자본의 가치(=화폐량)를 넘어서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방향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가치의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의 문제다.

 

 운동의 사유화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의 문제도 크게 다른 문제는 아니다.

 압축하여 말한다면 역시 근본적인 것은 사상적 전환이요 가치의 문제이다. 현장노동자의 회폐가치라는 판단기준을 어떻게 새로운 가치로 바꿔 나갈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말’과 ‘언어’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이다. 고령화되는 정규직의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비롯하여 다양한 실천이 필요하다.

 

 또한 낡은 정파운동이 보여주는 부정적 모습들을 비판, 제거함으로서 재구성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특히 이런 점에서 거의 모든 노조활동이 ‘정파의 정치공학’에 움직이는 현실에 맞선 ‘정파비판’은 그칠 수 없는 문제다.

 대중을 배제하는 부르주아 대의제적 요소를 가득 안고 있는 노동조합의 운영원리를 근본에서 비판하면서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을 강화하는 등 대중조직의 활성화 또한 운동의 공유를 위한 노력이다.


 오늘날 노동운동에서 흔한 상투어가 되버린 ‘혁신’은 결코 몇 가지 제도의 개선 문제가 아니다. 근본에서 노동의 사적 성격의 강화에 맞서는 투쟁이요 운동의 사유화에 맞서는 투쟁이다. 현재 노동해방을 위한 유일한 실천은 ‘삶의 가치’에 대한 투쟁뿐이다.(0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