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은 계급조직이다
하 종 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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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읽는 글
1. 노동이란 무엇인가
2. 노동자는 누구인가
3. 헌법에 노동삼권을 규정한 이유
4.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5. 노동자 계급의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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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는 글>
나도 군대를 갔다왔다. 꼬박 32개월의 젊음을 군대에 바쳤다.
제대를 2개월 앞두고 말년휴가를 받았는데 휴가를 마치고
귀대해보니 그 사이에 소대장이 바뀌어있었다. 새파란 ROTC
출신 소위가 새로운 소대장이라고 대뜸 나한테 반말을 하며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제대할 때까지 2개월
동안 그를 깎듯이 소대장으로 모셨다.
우리 소대원들 중에는 그 소대장 말고도 시켜만 준다면
얼마든지 소대장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인품도 훌륭하고 군대 경험도 많고 통솔력도 있는 소대원들이
여러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누구도 소대장을 할
수는 없었다. 소대장은 장교라는 `계급`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밥풀떼기 하나를 이마에 붙이고 온
소위만이 그 소대장이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소대원들은 하고 싶어도 소대장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계급`은 바로 역할을 규정하는 것이다. 다른 계급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노동자 계급이다. "나는
노동자 하기 싫다"고 아무리 우겨도 소용이 없다. 노동자는
이미 `노동자`라는 그 `계급`만으로 사회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과 사명을 갖는 것이다. 다른
계급은 그 일을 하고 싶어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사용하여 자연을 사람의 생활에 쓸모있도록 변화시키는 활동을 끊임없이 해야한다. 이러한 인간의 활동이 곧 `노동`이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자연에 본능적으로 적응하며 살아갈 뿐이지만 인간은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변화시키고 동시에 자기 자신도 변화되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노동한다`는 사실을 들기도 한다.
인간은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손이 자유롭게 되었고, 손이 자유롭게 되면서 더욱 새로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리하여 얻어진 각종 생산도구들은 대대로 전해지고 대를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의 손은 노동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달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노동을 하면서 날이 갈수록 신체가 발달되고 새롭고 더욱 복잡한 작업에 끊임없이 적응하게 되었다. 결국 노동이 인간의 모습을 오늘날과 같이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노동의 발달에 따라 자연에 대한 지배가 시작되고 시야가 넓어지고 함께 모여서 살고 있는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더욱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를 맺으면서 결합되었다. 서로 협력하는 것이 보다 유익하다는 것을 노동 과정을 통해 깨달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의사를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했다. 언어는 또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발달시키고 논리적 사고는 사람들의 언어와 노동을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노동은 사회 관계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변화시키면서 결국 사회적 진보를 촉진시켜왔다. 이러한 과정은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획기적인 계를 통하여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노동자는 누구인가>
이처럼 인간의 노동은 인류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좀 지나치다면, 백보를 양보하여 `중요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자. 아무리 보수반동이라고 해도 그것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년 전쯤에 어렵사리 구해 본 한국노총의 규약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가슴 뛰는 표현이 있었다. 그 후에는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아직도 그냥 있을 것이다.
"우리들 노동자는 생산의 직접적 담당자이고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며 사회 발전의 추진력이다. 또한 우리는 사회정의
실현의 선구자이고 평화의 강력한 옹호자이며 전진적 문화
창조의 주역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자. 다만,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아두자.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고대의 `노예`와 중세의 `농노`가 지금 우리 노동자의 선조 뻘 되는 사람들이지만, 노예와 농노를 `노동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신분상으로는 예속되지 않으면서 임금을 목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비로소 `노동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임금 노동자`라는 말이 노동자의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고대 노예의 생활에 비하여 중세 농노의 생활은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에 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생활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어 온 것에 비하면 중세의 영주는 고대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 역시 중세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축소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러한 현상을 바로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시대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체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행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 진행 방향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과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헌법에 노동삼권을 규정한 이유>
박노해 시인과 같은 현장에서 잠깐 동안 활동을 했던 내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10여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열심히 노동운동을 했는지는 내가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안다. 그는 정말 내가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고 그의 가족들 역시 그와 함께 `똥꾸멍이 찢어지는` 고생을 했다. 그의 부인은 나이 어린 아이들을 하나는 등에 엎고 하나는 손에 딸린 채 이부자리를 싸 짊어지고 노동부지방사무소 현관에 가 "내 남편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드러눕기도 했다.
그가 몇 해 전에 작은 기업체 하나를 인수하고 이를테면 `중소 자본가`의 반열에 들었다. 은행 빚에 허덕이는 작은 회사를, 그 빚을 모두 책임지는 조건으로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없이 인수했다. 처음에는 고생을 했지만 최근에는 돈을 엄청나게 잘 벌어서 돈을 물 쓰듯 한다. 얼마 전에 집에 오디오를 하나 장만했다는데 내가 "얼마짜리를 샀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욕 먹을까봐 말 안하겠다."고 버티다가 내가 자꾸 물으니 결국 답했다.
"응, 스피커만 천만원 조금 더 들었어."
그 친구가 처음 회사를 인수하고 며칠 안되었을 때, 우리 연구소에 놀러와서 푸념하기를...
"우리 회사에 골수분자가 네 명 있는데 말이야. 그 네 명만 없어도 내가 맘이 편하겠어."
"골수분자가 누군데?"
"노동조합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회계 감사야. 내가 회사를 인수하기 전에 먼저 사장이 이 사람들을 모두 해고도 시켜보고, 구속도 시켜보고, 폭력배들 시켜서 죽지 않을 만큼 뚜드려 패 보기도 하고... 그래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던 완전 독종들이야."
그는 정말로 한숨을 쉬면서 낭패해하는 표정이었다.
노동운동을 10년 이상 헌신적으로 했던 사람도 자본가가 되어서는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 우리 자본주의 사회다. 그 친구의 인격이 특별히 모자라거나 덕성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게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지극히 보편적인 모습이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도 그 지경이니 보통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숲에 보면 키가 큰 나무가 있고 키가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아무리 그의 마음이 착해도 키 작은 나무에게는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키 작은 나무가 햇볕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키 큰 나무의 가지를 쳐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그것을 일컬어 `구조적 모순`이라 하고, 그래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영원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적대적 모순 관계`에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가끔 "우리 사장은 어쩌면 그렇게 노동조합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것을 본다. 자본과 권력은 노동조합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혐오한다. 노동조합만 없으면 정말 살 맛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법을 만드는 세력은 자본과 권력이다. 재벌과 정치인이 손을 잡으면 못 만들 법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노동조합을 혐오하면서 어째서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법 체계 속에서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을까? 헌법으로부터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각종 특별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그 이유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결국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 그 동안의 인류 역사를 통하여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싫어도 하는 수 없이 법 체계 속에서 노동조합의 지위를 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나라의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똑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자본가는 자본의 관점으로, 권력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중에 하나만 맞고 둘은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관점과 설명이 옳은 것일까? 나는 노동운동 한다는 사람이고 이 글을 읽을 사람들도 대부분 노동자들일테니 당연히 노동자의 관점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옳은 것이 아니다.
80년 9월부터 이런 활동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니 내가 노동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온 지 만 19년이 넘었다. 19년이란 세월은 개인의 인생에서는 꽤나 긴 기간인지 모르나 장구한 역사 속에서는 점에 불과할 만큼 짧은 순간이다.
그런데, 19년 동안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을 지켜 본 알량한 경력만으로도 나는 노동과 자본과 권력이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면 신기할 정도로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를 수 없이 봐왔다. `전교조` 문제가 그랬고 `위험작업중지권`도 그랬고, `제3자개입금지`도 그랬다. 노동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거의 모든 문제가 그랬다. 처음에는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릴지라도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 노동자의 주장이 옳았다.
박정희의 그릇된 경제 정책이 우리나라를 빈 깡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는 예언은 24년 후에 정확하게 적중했고,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되는 데에는 15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하, 이래서 노동자가 진보세력이라는 것이로구나` -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현실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특권>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가 무엇일까? 노동자의 관점이 본능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우리의 관점이 옳은 것은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이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길게 봐도 결국은 올바른 관점을 가진 사람만이 올바른 전망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만이 가지는 특권이란, 쉽게 말하면(어렵게 말하라고 해도 못하지만)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사장이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최근 신문지상을 연일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이 대부분 그런 노력의 결과들이다.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에 "노동계의 총대를 메고 정부의 그릇된 구조조정 정책에 쐐기를 박는다"는 훌륭한 목표가 없었다거나, 방송 노동자들의 파업이 "개혁적 방송법 쟁취"라는 고상한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한 푼 더 받겠다"는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노동가요 `또 다시 앞으로`에 "역사에 발 맞추어 하나 둘 셋"이라는 가사가 들어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한 푼 더 받겠다"고 하는 임투가 왜 역사에 발맞추는 것인지, 노동자들이 "하루 더 쉬겠다"고 하는 단체교섭이 왜 역사에 발맞추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와 주장은 "단지 그대의 이름이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정당한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이 노력하는 과정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노동조합이고 구체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그 활동이 추동되는 것이다. 조합원 개인이 하는 작은 활동일지라도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역사의 기관차`이다.
(뱀발 : 위와 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한 후에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동료들을 속이고 사기를 쳐도 그 노력이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런 노력까지 모두 말하는 것은 아니니, 제발 새겨서 듣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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